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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밍굴라바, 뚜라

[이주, 꿈을 만나다] 밍굴라바, 뚜라


이세기

모든 것은 지나간다
분주한 도심 위로 구름이 그림자를 이끌며 흘러간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도, 목마름도, 그리고 또 삶도, 고통도 모두 지나간다. 뚜라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문득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아마도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묻는 방식이 아닐까. 그와 수차례 통화한 후에야 비로소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부천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짧지 않은 시간에 몇몇의 아시아계 이주노동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얼마나 됐을까, 구부정하게 키가 큰 그가 인파 속에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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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라(U Thura). 그의 나이 39세. ‘버마행동(Burma Action Korea)’ 대표. 가족의 품을 떠나 오늘날 ‘미얀마’라고 불리는 나라를 떠나온 지 17년째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한사코 ‘버마’라고 부른다. 산업연수생으로 6개월을 보낸 후 스스로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된 사내, 한국말을 한국인보다 더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내. 그리고 떠도는 영혼이 되어 그의 조국으로도 갈 수 없고, 그를 받아줄 국가도 없는 난민의 처지에 놓인 사내. 그 사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994년이다. 240명의 버마 산업연수생의 일원으로 들어와 충북 단양에 있는 장판과 시트지를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급여는 18만 원이었다.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든 비용으로 인해 월급은 받지 못하고, 야근 수당만 월 3, 4만 원을 받았다. 기술을 배운다는 자부심으로 일을 했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기술을 배우기는커녕, 일한 만큼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는 애초의 약속과 다르다는 항의를 했다. “노동한 만큼 월급을 달라”는 요구는 묵살당하고 사업장에서 쫓기듯 뛰쳐나와야만 했다. 그리고는 친구가 있는 부천으로 일자리를 옮긴 후, 수납용 김치통을 만드는 공장을 비롯하여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자동선반(CNC)공으로, 다시 양말을 만드는 공장, 소각로를 만드는 공장을 전전하며 인천, 안양, 김포 등지에서 2001년까지 6년여 동안 일을 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새로운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1988년 이후 지속되어온 버마의 정치 현실과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은 그를 활동가로 변하게 했다. 그는 버마의 정치 상황과 한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루는 잡지 『새천년의 창(Millennium window)』을 발간하는 일과 한국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버마공동체’에 참여했다.
그의 이러한 삶의 내력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1988년 버마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양곤(Yangon)에서 이에 항의하는 민주항쟁이 불붙기 시작할 때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에, 먹고살기에는 괜찮았어요. 사람들은 바쁘고, 정치 상황도 모르고 있었죠. 어느 날 갑자기 인근의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이 대학생들을 총으로 죽이는 거예요. 그게 계기가 되어 시위에 참여하게 됐어요.”
학생 조직의 홍보팀장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그는 군인들의 진압으로 도피자가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국경 지역인 태국, 인도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쫓기는 몸이 된 그는 인도―버마 국경으로 향했으나 국경을 넘지 못하고 한동안 이름을 숨긴 채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 후 1년 이상을 도피자로 살다가 다른 도시로 가서 이름을 바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 기계과를 졸업한 후 1994년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발을 내디뎠다.
“2003년이었어요. 당시에 한국에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약 3500명 정도 되었어요. 그중에 약 2000명 정도가 미등록이었는데 노동조건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어요. 때마침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강제 단속과 추방이 실시되었는데, 강제 단속과 추방을 중단하라며 이주노동자 대표로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죠.”
그때 농성을 하면서 그는 버마민주항쟁 때가 떠올랐다고 했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결국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이 맴돌았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노동허가제’를 들고 나왔고, 한쪽에서는 ‘단속 중단과 3년 이상 미등록자도 출국 후 재입국 허용’을 주장했어요. 그때 88년 버마민주항쟁 때의 생각이 나는 거예요. 농성 시작은 쉬운데, 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죠. 한국 정부도 노동허가제를 들어줄 리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어요. 결국 ‘단속 중단과 3년 이상 미등록자에게도 출국 후 재입국을 허용해달라’는 요구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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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3개월 동안 이주노동자의 대표로 농성에 참여했다. 농성 중 그는 매일 회의 때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버마 사람이 버마를 떠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버마의 정치 현실이 있었다. 군부독재의 강압적 통치는 계속되었고,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 연금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농성이 끝나자 ‘버마행동’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버마의 민주화와 한국의 버마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한국에 있는 버마 사람들의 단결과 권리를 위해서 공동체 활동에 주력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문제들이 버마의 정치 현실과 연결되어 있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정치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갈 수밖에 없어요.”
버마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버마행동’은 매주 거리에서 ‘프리 버마 캠페인(Free Burma Campaign)’을 펼치고 외쳤다. ‘버마에 민주주의를! 버마에 평화를!’ 군부독재 하에서 고통받고 있는 버마의 실상을 한국 사회에 알리고, 버마의 민주화와 한국 정부의 정책적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버마민족민주동맹(NLD) 한국지부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최근 정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난민 신청도 늘었다고 했다. 난민 문제로 화제가 바뀌자,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삶이 자꾸 덜컥거리듯 그 무엇인가가 발목을 잡는 것 같았다. 혁명가의 풍상을 닮은 그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집으로 가는 먼 길
“버마는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하는 나라예요. 군부독재를 피해 태국과 버마 국경에 약 200만 명 정도의 난민이 생활하고 있죠. 인근의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를 떠돌거나, 국경을 넘어오지 않고 밀림 등지에서 숨어 지내는 난민까지 포함하면 몇백만 명인지 추산이 어려울 지경이에요.”
현재 한국에서 난민 자격을 얻은 버마 사람들이 50명이 넘는다고 했다. 물론 그 역시 난민 신청을 한 터였다.
“2004년에 난민 신청을 했어요. 올해 5월에 결과가 나왔는데 반려가 됐어요. 사유는 증거가 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반려가 된 주된 요인은 “이주민 인권 활동으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는 게 반려의 원인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한국에 난민 신청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데, 어떻게 증거자료를 챙겨 왔겠어요.”
그는 처음에는 난민 신청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난민 하면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 모습만 떠올랐어요. 왜, 내가 난민인가 했죠. 그러다 강제 단속으로 추방이라도 되면 저는 여지없이 반정부 활동을 했다고 감옥에 가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요. 직접적으로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나니 나야말로 내 나라에 갈 수 없는 난민의 지위를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가 뱉은 말에서 독한 고독이 묻어나왔다. 외로움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를테면 떠도는 스산함 같은 것이었다.
그의 얘기를 듣자니, 1980년대의 한국 상황이 몽타주처럼 겹쳐 지나갔다. 한국과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서일까. 아시아에서는 모든 게 이어져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늘이라는 시공간 속에 카오스처럼 뒤엉켜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불현듯, 김수영의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푸른 하늘을」 부분

아버지를 부정하고, 국가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고독한 자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고독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고독한 자의 입에서 다시 아시아의 오늘이 흘러나왔다.
“한국도 버마의 민주화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와 폭넓게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인데, ‘버마 문제는 버마 사람들의 문제다’라고 하면서 한국과 관련이 없다는 식의 태도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룩한 나라로서 걸맞은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같은 아시아인으로 한국 사회가 아시아를 더 사랑하고 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은 거침이 없다.
“버마 문제는 아시아의 문제입니다. 버마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시선에는 너희들의 문제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냉소주의와 배타주의가 있다고 봐요.”
그의 말에서 줄탁동시(啄啄同時)가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안팎의 모색과 연대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한 한국 정부의 역할을 유달리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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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모 기업이 버마에 무기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모르는 일이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정부의 묵인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득을 챙기기 위해 가스 개발 등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죠. 버마 군부독재에 무기를 지원하고 기술을 전달하는 것 자체가 곧 ‘마음대로 국민을 죽여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양곤의 군부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지요.”

그의 고단한 삶을 따라오다 보니, “밍굴라바.” ‘당신의 축복입니다’란 뜻을 지닌 버마의 인사말이 입에서 자꾸만 맴돈다. 뚜라와 헤어져 집으로 오는 길. 역 쪽을 향해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서 남루함이 걸어간다. 할머니 한 분이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으로 걷고 있다. 하지만 내일은 올 것이다.
양곤에서, 방콕에서, 다카와 카트만두에서도 내일은 올 것이다. 지하철에서 나온 메마른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간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웬일일까, 파초가 찢긴 채 나부낀다. 어둠이 내려온다. 바람이 일어선다. 이 바람은 아시아 도처에서 일어설 것이다.


*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1조 난민의 정의 규정에 따르면,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 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를 난민이라고 한다. 한국 정부는 2007년 8월 버마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를 난민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뚜라 씨를 비롯하여 버마의 자유와 평화를 바라며 투쟁하는 이주노동자 출신의 ‘버마행동’ 활동가들의 난민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현재 버마의 정식 국명은 미얀마연방이다.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부정하고 ‘버마’라는 국명을 고수하고 있다.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77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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