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주 꿈을 만나다

나는 누구인가?(1)

나는 누구인가?


이세기



이주노동자, 시인이 되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하킴(32세)은 한국이 낯설지 않다. 그가 한국에서 맞는 여름은 올해로 열다섯 번째다. 그에게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에게는 ‘한국의 겨울 날씨는 고춧가루만큼 맵고, 한여름은 방글라데시보다 더 덥다’고 엄살을 떨 줄 아는 익살이 있다. 가끔씩 고향 인근의 시원스럽게 흐르는 강에 몸을 던져 텀벙 들어가는 꿈을 꾸지만 이젠 그 꿈마저 가물가물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청년기를 보낸 그다. 이주노동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는 고향 포리풀(FARIDPUR)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94년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주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고향에 의류공장을 세우는 꿈을 꾸었다. 거개의 아시아 이주노동자가 그러하듯이 그도 가족과 친척이 마련해 준 이주비용을 가지고 집안을 대표해서 이주를 한 것이다. 젊기에 그의 꿈은 높았다. 가난한 방글라데시를 위해 그의 꿈은 부풀어 올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왔다. 그리고 현대판 노예 신분이라는 산업연수생으로 일을 했다. 모질게 일을 했다. 하지만 요즘 그 꿈이 변했다.

“겨우 먹고살아요. 다들 힘들잖아요.”

한국에서의 생활이 녹록치 않다고 했다. 자신의 월세와 생활비를 빼고, 고향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얼마의 돈을 보내고 나면 빠듯하다. 일부에서는 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큰돈을 벌 거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편견에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력이라는 이유가 크다.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막상 속내를 보면 고된 노동과 야근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며 정신적인 고통까지 합하면 오히려 목숨 붙이고 산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우리도 사람이잖아요.”

공장과 집 이외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 이주노동의 고역을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단순히 돈만 벌고 너희 나라로 가면 그만이라는 태도나 비아냥거림,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들을 때면 마음이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라는 존재이기에 때론 자신의 정체성에 오히려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처음 그가 이주노동을 떠나올 때 다짐한 꿈을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그는 자신이 품었던 꿈이 허깨비 같다고 한다. 그의 10여 년의 신산한 이주노동의 꿈이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꿈이요? 세상을 바꾸고 싶지요. 꿈은 변하는 거잖아요.”

대뜸 그가 말을 받았다. 갑자기 생뚱맞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의 지금까지 내력을 곰곰이 쫓아가면 그럴 만도 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놓고 하루 12시간씩 일만 했어요.”

처음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인천의 핸드폰 기판을 만드는 PCB라인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동료들은 그를 보고 일벌레라고 곧잘 놀려 대곤 했지만 공장의 컨테이너 방에서 외출 한 번 안 하고 고향에 있는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일했다.  

“처음 한국 생활은 전쟁 같았어요.”

한번은 몸이 아파서 작업장에 가지 못했다. 처음 먹는 한국 음식 때문인지 매일 토하고 몸에서 열이 나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때마침 관리자가 기숙사에 들어와 다짜고짜로 꾀병을 앓는 것 아니냐며 발로 몸을 이리저리 뒤적일 때는 인간이 차마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로 관리자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대항하는 것은 그대로 해고 사유가 되었고, 그것은 곧 추방을 의미했다. 그는 4일 동안 기숙사 방에서 방치된 채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이처럼 회사 측에서는 걸핏하면 산업연수생의 신분을 악용해서 이탈 신고라는 무기로 엄포를 하거나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이 유달리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것도 한몫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눈빛만 봐도 상대방이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싫어하면 눈빛에 보이잖아요.”

모든 이주노동자가 겪는 일이겠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똑같이 인간이면서 인간 취급을 하지 않을 때 느끼는 기분을 알 수 있겠느냐며 되묻곤 했다. 어디에다 하소연할 데가 없어 때로는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짓누르는 기분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는 용케도 다른 이주노동자에 비해 운이 좋았다고 했다. 그런대로 공장 생활에 적응을 잘했고, 산업연수생으로 비자가 만료되었지만 그대로 한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 적응하면서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리고 그는 30대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미등록자 신분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서도 PCB기술자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외로움인지 아니면 비애인지 모를 감정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가슴을 열고 들어왔다. 가끔씩 홀로 공장에서 와서 빈방에 드러누우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나이 32살. 아직 미혼에다가 고향을 갈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세상에 버려진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있다가 돌아온다는 약속을 그는 지키지 못했다. 고향의 들과 강이 아직도 선연하지만 이젠 이골이 난 머나먼 이국에서의 이주노동도 생활의 일부기 되었다. 다만 가끔씩 고향의 하늘이, 강이, 산과 꽃이 그를 찾아왔다.

공장에서 야근 작업을 할 때나, 홀로 텅 빈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볼 때, 더욱 그리운 무언가가 간절하게 다가왔다. 그럴 때면 그는 노트에다 시를 받아 적었다. 그렇게 쓴 시는 한 권 분량의 노트가 되었다. 그는 어느 날 불현듯 시가 그렇게 찾아왔다고 했다.


세상이 옛날처럼 돌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항상 바쁘다
달과 태양 그리고 별들이 옛날처럼 빛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어둡다
나는 왜 나처럼 되었나
나의 마음은 아프다
어느 날 하루 나는 마른 꽃처럼 마음도 말랐다
당신은 나를 알아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
하나의 진실을 꼭 잡으면서
너는 나를 버린다 나를 바보라고
그래도 나는 왔다 당신의 사랑을 위해
당신은 나를 모른다 하늘은 있지만 구름이 없다
나는 어디에도 없다
바람은 있지만 나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도 모른다, 나를」 전문


일하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

그가 시를 쓴 연유는 무엇일까?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지독한 외로움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가슴속에 고이는 것이 시인지 몰랐다고 했다. 다만 불법 단속을 피하기 위해 열두 시간 맞교대인 공장에서 야간작업 근무를 하다가 시가 오면, 종이 박스를 뜯어다가 깨알같이 시를 적곤 했다. 공장에서도 그를 믿고 작업 지시를 한 후 퇴근을 했다. 그럴 때면 혼자서 기계를 돌리고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작업대 위에서 시를 썼다.

때로는 사랑의 열병으로 때로는 단속의 불안을 안고 썼다. 몇 달 동안 일이 없을 때에는 비정규직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벼랑으로 내몰리는 삶의 비애를 느꼈다. 그때마다 그는 불안과 고된 이주노동으로 지친 육신을 시로 위로했다. 시는 그로 하여금 공장과 집을 오가는 쳇바퀴와 같은 단조로운 생활에 활력을 주었고, 이국에서의 고된 노동을 견디는 힘이 되어 주었다.

“시가 밥처럼 여겨질 때가 있었어요.”

시를 쓰다 보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어두운 밤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고 했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그가 보냈을 공장의 밤이 떠올랐다.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로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 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김민기, 「공장의 불빛」

야간작업을 하다 잠시 멈춰 고개를 들어 공장의 불빛을 보았을 터이다. 물량을 뽑아내기 위해 그의 손과 발이 부산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불빛이 그의 눈에 흐릿하게 스며들던 때도 있었으리라. 텅 빈 공장에 남아 기계 소리와 함께 작업을 할 때면 홀로 있는 자기 자신을 볼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무료함을 잊기 위해 그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콧노래는 다시 시가 되어 찾아왔다. 이주노동자의 손끝에 슬픔과 사랑이 흘러나왔다.


모든 것을 당신들에게
나는 원한다 낙원을
자연의 모든 것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뭇가지나 잎과 줄기에
나누어 준다 나의 모든 아픔을
아파서 아파서 나는 시인이 되었다
나의 그림자 중에도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사진을
사랑의 슬픔에 나는 상처를 입었다
행복을 바꾸어 얻었다 슬픔을
영원히 가슴속에 놓아두었지 그를
알고 있다 그는 안 된다 나의 사람이
그러나 가슴에 두고 그를 가슴속 깊이
왜 그의 노래를 부를까
내 자신을 태워 버린다 재로
그러나 그 이름은 사랑
머물고 간다 그냥 바라는 것이
누가 주나 나의 생활고를
누가 주나 마음을
누가 되나 나의 사람
사람이 말한다 나에게 나는 낭만적이다
     
 ―「시인」 전문


그가 시인이 된 것은 그의 말마따나 ‘아파서’일지 모른다. 나는 그것이 그가 이주노동에서 아팠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아팠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 하나 있다면 그가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한국어 말하기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꿈을 꾸기 때문에 사람이다. 나도 사람이니까 꿈이 있다. 나의 고향에 조그만 병원을 차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다섯 가지의 중요한 것이 있다. 먹는 것, 자는 것, 치료 받는 것, 교육 받는 것 등이 있다. 치료가 다섯 가지 중에 들어간다. 생명은 귀중하다. 나는 나의 사랑 방글라데시가 생명을 누리는 나라가 되길 원한다.”

그는 열병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산과 강이 있는 고향을 잊지 못했다. 사람들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고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만들어진 허구라고 했다. 그는 빈곤에 짓눌리고 일이 없어 거리를 오가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하지만 그의 이주노동자로서의 생활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주었다. 일 년 동안 일해도 몇 개월 실직하여 놀고 나면 수중에 돈은 바닥나고 생활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설움도 쌓였다. 때론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느낄 때는 밤새 치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노동하는 삶은 희망이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어느 날 거짓말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같은 처지의 이주노동자로 온 여성이었다. 물론 그는 그의 사랑 이야기를 숨겼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는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가끔 결혼을 하지 않을 거냐고 농을 치면 뜸 들일 틈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 친구 없어요.”

아마도 첫사랑을 숨기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를 알고 있는 동료들은 그가 몸살을 앓을 정도로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그녀와 새로운 삶을 사는 꿈을 꾸었다. 함께 이마트를 다니고, 옷을 사 입고, 밥을 먹고, 공원 등지를 다니며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하긴 부초와 같은 이주노동자이지만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누구는 뜨내기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에게 인생이란 뜨거운 사랑 같은 것이다. 그가 자신이 쓴 시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만국의 공통언어잖아요.”

그의 눈망울이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스치고 지나가듯 흐렸다. 자신도 사랑이 필요한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로 인하여 괴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 역시 목말라했고, 단순하면서 소박한 사랑을 갈구했다.

“사람이니까, 외로우니까 사랑하죠.”

이주노동자에게 사랑은 국적을 뛰어넘는 일이다. 그의 말마따나 외로우니까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만나 사랑을 나눈다. 사랑에 무슨 언어가 따로 있겠는가.

이주노동자에게 사랑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동 현장에서의 상습적인 임금 체불과 언제든지 해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등록자라는 신분적 제약이 언제나 그를 짓눌렀다. 거기에다 인종차별적인 인권침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든지 들이닥칠 수 있는 강제단속과 강제추방은 그로 하여금 만성적인 불안을 낳게 했다. 철장만 없지 갇혀 있는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은 사랑조차 멍들게 하고 금가게 하는 이유가 된다. 혹여 단속에 걸려 잡혀가는 애인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고통도 동시에 수반된다.

어떤 동료는 같은 처지의 이주노동자로 온 여성을 만나 결혼을 하여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낳았다. 어떤 동료는 한국인 여성과 만나 동거를 하고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을 가깝게 지켜보았다.

그도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꿈을 꾼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에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니다. 가뜩이나 불안한 미등록자로서의 삶은 바라는 꿈이 현실로 되기까지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했던가. 그에게 사랑은 시로 태어났다.  


오늘 너에게 좋아한다고 느낀 것이 잘못이다
왜냐면 너는 다른 나라의 꽃
갑자기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왜 나는 생각하는가
너는 나의 사람이라고
그러나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너는
너의 삶에 왔다 새로운 애인
왜 내가 혼자 살아야 하나
이제 그만 이별
지금까지 마음의 뜨거운 정열이 불탔다 나의 가슴에
오늘부터 생각하기를
갑자기 바람이 와서 뜨거운 정열을 끄고 갔다
나는 나의 인생을 찾았다
당신은 나에게 힘을 주세요
옛 추억을 모두 잊을 수 있도록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가고 싶다
나의 고향으로
      
―「이제 그만 이별」 전문  




* 1994년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한 회사에서만 12년간 일한 그는 2009년 6월 18일 야간 근무 도중 방글라데시 동료 5명과 함께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에 의해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15년간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야간 근무만 한 그는 결국 불안과 초조한 미등록체류자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방글라데시로 추방되었다.



글쓴이 시인, 인권운동가로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다.

* 하킴의 이야기는 다음 호에도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삶이보이는 창'69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이주 꿈을 만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굿다하 피스!  (0) 2010.03.12
나는 누구인가?(2)  (0) 2010.02.16
시민 K씨  (0) 2010.02.09
이주노동자 시인, 하킴  (1) 2009.07.24
경제위기의 희생양 이주노동자  (0) 2009.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