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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나는 누구인가?(2)


나는 누구인가? (2)


이세기



무지개 슬픔, 이주노동
늦은 밤에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하킴이 단속에 걸려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만난 곳은 공교롭게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있는 보호실이었다. 그는 보호실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으면서 “괜찮아요”라는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본 그의 웃음이 여전히 싱그럽다.

“야간 근무를 하고 있는데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들이닥쳤어요. 아마 누군가 신고를 받고 온 모양이에요.”

그는 한 공장에서만 12년간 일을 한 베테랑 기술자이기도 하다. 공장에서도 그가 없으면 기계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그를 신뢰했고 전적으로 일을 맡겼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잡혀서 정리도 못하고 가게 됐네요.”

단속에 잡혀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게 된 섭섭함이 그의 말끝에 묻어났다.

“한 일주일만이라도 시간을 줘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함께 이런저런 얘기도 나눌 수 있었으면….”

물론 그도 안다. 아쉽지만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대다수 아시아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강제 단속에 의해 추방당하는 절차라는 것을. 언젠가 닥칠 운명이 왔을 뿐이다. 아무런 준비도, 예고도 없이 한국에서의 그의 사랑도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그는 언젠가 사랑은 정원을 가꾸는 일이라고 했다.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 어루만지고 대화하고 모양을 내듯 서로 가꾸어 나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꽃을 사랑한다 모두들
모든 꽃을 누구나 좋아하나?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꽃
꽃이 핀다 마음의 정원에
정원에는 언제나 빛이 안 보인다
그렇게 어둡게 살고 있다
당신 언제 오세요 나를 사랑하러
마음의 정원사 그냥 부른다 너의 노래
언제 만날 수 있나 너를 보러
언제 가질 수 있나 너의 마음의 빛깔을
나의 눈은 잠도 없다
그냥 너의 생각에 잠겨 있다 매일같이
얼굴에도 웃음이 없다
아침저녁 생각한다
언제 필까 내가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꽃」 전문

강제 단속이 되었는데도 그의 말투는 담담했다. 애인 이야기도 꺼내 놓았다.

“한 5년 동안 동거를 했어요. 인도네시아에서 온 무슬림 이주노동자였어요.”

그녀 역시 일을 하다가 얼마 전에 강제 단속으로 인도네시아로 추방되었다. 후일을 도모할 겨를도 없이 미등록 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면회도 못하고 헤어졌다. 그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니 언젠가 ‘아시아문학 낭송제’ 때 낭송한 시가 떠올랐다.

슬픔은 나의 인생 그 삶에 울다
어느새 슬픔이 좋아진 나

기쁜 슬픔의 인생은
내가 먼저 바뀌어 찾아온다

내 가슴속 창고에 쌓인 무지개 슬픔
허기진 당신들에게 빌려 주고 싶다

삶 전체를 감싼 슬픔
우리는 친구다

슬픔아, 하루 종일 함께하는 내 친구야
네가 고맙다

―「슬픔의 친구」 전문

신산한 이주노동자로서의 생활과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은 그를 슬픔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 눈을 뜨게 했다. 고된 이주노동과 사무치는 사랑은 그의 가슴에서 시로 찾아왔다. 그렇게 쓴 시가 노트 두 권을 넘는다.

그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시 낭송회에 참여했다. ‘아시아문학 낭송제’에 참여하거나 ‘아시아 문학을 거닐다’ 등 아시아 책을 모으는 낭송회에 나가서 시를 낭송했다. 뿐만 아니라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시위에도 곧잘 참가했다. 시는 그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은 벵골어 하면 로빈도날 따굴(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을 얘기하지만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카디 나즈둘 이슬람이라는 시인을 좋아해요. 그는 학교도 다니지 못해 배우지 못한 시인이지만 방글라데시를 위해, 민중을 위해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에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보다 카디 나즈둘 이슬람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영어의 위력이라고 했다. 타고르는 브라만 계급 출신이었지만 이슬람은 천민 출신이라서 그만큼 서구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슬람처럼 저항시도 써 보고 싶고 벵골어로 영원한 문학의 주제인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귀환하는 영혼의 메아리
그는 가장 행복했던 때로 인천 가좌동에서 살던 때를 꼽았다. 거북시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골목 곳곳에 할랄 푸드가 있고, 아시아계 이주민과 이주노동자들이 쪽방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네. 가까운 곳에 공단이 있고 아시아 음식점과 대형 마트가 있고, 골목에는 숨을 죽인 채 낮에는 잠자고 밤에만 일하는 동료들이 살고 있는 곳. 그 역시 청춘의 한복판을 보낸 제2의 고향이었다.

“제게 가좌동은 고향이에요. 내가 걸었던 공단의 길, 건물, 이마트, 식당, 술집…. 다 좋았어요. 아마도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그는 15년간 가좌동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눈을 감아도 모든 골목들이 선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좋았던 것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배우고 싶은 만큼 배웠다’는 것이다. 빈 냉장고와 몇 장의 달력이 전부인 한 칸짜리 쪽방과 공장에서 야간 근무를 하면서 시를 썼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했다.

그에게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산업연수생 시절에 겪은 일이라고 했다.

“역시 차별은 인간적인 모욕을 줘요. 사장님은 걸핏하면 ‘너희 나라로 가’라며 모욕을 주곤 했어요.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 때, 저는 인간이라서 힘이 들었어요.”

그는 단속으로 잡히기 직전까지 한 공장에서 12년간 일을 했다. PCB 기술자로 야간 근무만 전담한 그는 가끔씩 시 낭송회에 초청돼 외출을 할 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나의 시를 낭송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의미 있는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의 시를 들을 때 가슴이 뛰었어요.”

그럴 땐 그도 천상 시인이었다.

“내가 시인으로 태어난 나라는 한국이에요. 한국의 가좌동. 나의 영혼이 메마르지 않게 해준 마음의 고향이에요.”

그의 말끝이 흐려지면서 눈물이 맺혔다. 여전히 그는 “괜찮아요”를 반복하지만, 그가 두고 떠나갈 자리가 왠지 무거워 보였다. 그의 속 깊은 말이 다시 떠올랐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그때부터 나는 꿈을 꾸었다. 못 먹는 사람들은 하루하루가 그냥 가고, 만날 아프고 슬퍼하며 하루가 간다. 잘사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면서 살지만 못 먹는 사람은 배를 못 채워 죽어야 한다. 나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은 나의 형제요, 친구요, 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돈이 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겠다. 한국에서 일을 마치고 방글라데시에 돌아가면 회사를 차릴 것이다. 그러면 놀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고 꿈을 꿀 수 있다. 나처럼 방글라데시 사람이 똑같은 꿈을 꾼다면 우리의 작은 꿈들이 모여서 마침내 일이 없어 놀고 있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작은 티끌들이 모여서 거대한 꿈이 이루어진다. 한국의 속담에도 ‘티끌 모아 태산이다’라는 말이 있다. 물이 조금씩 모여서 거대한 바다가 된다.”(<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발표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그러는 와중에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고민을 했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 그는 “나는 공장에서도 없었다. 이마트에서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작은 차이로 인한 차별로 고통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 말의 그림자에는 ‘나는 이주노동자다. 보이지 않는, 탄압받는,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나는, 나는 이주노동자다’라는 메아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단속 과정에서 사람이 죽잖아요. 왜 죽겠어요. 사람으로 살려고, 살아가기 위해 죽는 거잖아요. 정말 죽어라 일한 대가가 강제 추방으로 끝나는 것이 과연 문명사회에 걸맞은 것인지 질문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 그는 귀국을 하면 시를 본격적으로 쓰겠다고 했다. 말의 힘을, 시의 힘을 그도 믿었다. 최근 그의 시의 주제가 사랑에서 사회에 대한 문제로 인식의 폭이 넓어진 것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서라고 했다.

“어느 날 집회에 참여했어요. 다 똑같은 사람인데 강제 단속이 되고, 심지어 죽고,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거잖아요. 우리의 피는 다 같이 빨갛잖아요. 침묵할 수 없었어요.”

실제로 그는 시 낭송회를 통해 자신의 말을 세상에 던지기 시작했다.

피부가 까맣거나 하얗거나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그 누구 그 어디서라도 나에겐 다르지 않네
사람 피는 다 같이 빨갛고 우리는 모두 한 사람에게서 왔네
나는 이미 알고 있네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그 하늘 구름처럼
같은 바람에 춤을 추며 살아가네
하나의 태양에서 나오는 햇살에 몸을 맡기고 있지만
누구는 행복하고 또 누구는 슬픈 현실
모든 사람이 사람에게 모든 나라가 나라에게
아껴주며 돕고 살아야 하는 한 하늘의 운명
지구에 사는 우리는 모두 가족

―「인생의 노래」 전문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한국은 제게 시를 쓰게 한 고향이에요. 새롭게 인권에 대해서 눈을 뜨게 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했어요. 아마도 그런 것은 제가 방글라데시에 가서도 계속될 질문이라고 봐요. 나는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그저 아무에게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는 떠났다. 추방된 몸으로. 고된 이주노동자로 살면서도 영혼이 메마르지 않았던 가좌동에서 숱하게 불면의 밤을 보내며 “나는 아무 데도 없다”라고 고통스럽게 자신을 성찰하면서 보낸 시간을 뒤로하고, 그는 추방되었다.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살아온 이웃이 추방되었다. 나는 그의 시 「이제 그만 이별」에서 부른 노래를 나직이 읊어 본다.

나는 나의 인생을 찾았다
당신은 나에게 힘을 주세요
옛 추억을 모두 잊을 수 있도록
새로운 노래를 부르면서 가고 싶다
나의 고향으로

―「이제 그만 이별」 중에서



글쓴이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삶이보이는 창'70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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