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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굿다하 피스!

굿다하 피스!

이세기

한밤의 난장 토론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에게서 전화 한 통이 왔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모임이 있는데 동석을 묻는다. ‘좋다’고 답한 후, 찾아가는 공단 길이 어둠으로 가득하다. 공단 초입에 있는 이마트는 불야성이다. 꼬리를 무는 차량 행렬을 뒤로한 채 공단으로 들어가자 밝음과 어둠의 착시현상이 급작스럽다. 터널처럼 어둠뿐인 길에는 공장 기숙사로 돌아가는 이주노동자 몇몇이 어둠을 뚫고 걸어간다. 추위 탓인지 귀마개에 자라목이다. 동지(冬至)가 가까워져서인지 초저녁이 한밤중 같다. 회합 장소인 공장 기숙사에 들어서자 카오스처럼 벗어놓은 얽히고설킨 신발이 자못 절경이다. 저것이 바로 삶이라면 그야말로 극적이다. 라호르에서, 카라친에서, 이슬라마바드에서 신발이 끌고 왔을 이주의 길이 불현듯 궁금했다.

“앗살람 알라이쿰!”
“알라이쿰 앗살람!”



세 평쯤 되어 보이는 방은 이주노동자로 가득하다. 방에 들어서자 오히려 방 밖이 왁자지껄하다. 때마침 12시간 맞교대를 위한 작업교대 시간이란다.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하는 기계 때문에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고 했다.

자리에 동석한 이주노동자들이 온 길은 각자가 다 다르다. 경기도 광주에서 파주, 김포, 가깝게는 인근 공장에서 찾아온 이주노동자들이 이를테면 마실을 온 모양이다. 때마침 이슬람 최대 행사인 사우디아라비아 성지순례 ‘하즈(Hajj)’에 참여하고 막 돌아왔다는 한 이주노동자의 얘기가 주목을 끈다. 한국에서 4년째 보내는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를 다녀오기 위해 휴가를 냈다고 했다. 무슬림 5대 의무 중 하나인 하즈를 다녀오기 위해 회사 측에 휴가를 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겨우 비자를 내서 성지순례를 다녀온 끝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만족감이 얼굴 전체에 물들어 있었다. 일생에 한 번은 다녀오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이루어진 기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겠는가. ‘뚜삐’라는 챙 없는 기도용 모자와 몸에 두른 ‘차도르(Chador)’라는 전통 의상에 기쁨과 감격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독실한 이슬람교도로서 생활하는 듯했다.

화제는 곧 새로 개정된 고용허가제의 재고용(3+2년)에 대한 의견으로 모아졌다. 최근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어, 3년 만료된 이주노동자를 재고용할 때 출국할 필요 없이 2년 미만의 범위 내에서 계속 고용할 수 있게 되자, 그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사용자가 취업 활동 기간(3년) 만료 전 외국인 재고용 요청시 2년 내 고용(3+2년)하도록 한 것이다. 또, 외국인은 재고용 계약 시 출국한 뒤 1개월 후 재입국해 3년간 재고용(1회 출국 3+3년)하던 규정도 폐지되고, 출국 절차 없이 최대 2년간 재고용(무출국 3+2년) 계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새로운 개정안에 대해서 나름대로 각자의 생각을 말했다. 어떤 동료는 5년 체류에 2년 연장을, 또 다른 동료는 6년 체류에 2년 연장 재고용 계약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현실성이 적다는 것을 본인들도 알고 있었다. 대다수는 3년 체류에 2년 연장보다는 3년 체류에 1개월 고향에 다녀온 후 재계약으로 다시 3년간 일할 수 있는 재고용  계약을 선호했다.

“기왕이면 한국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으면 좋겠어요. 기술도 숙련되고 한국어도 어느 정도 되기 때문에 한 해라도 더 연장되는 것이 저희들로서는 좋은 거죠.”

고용허가제 개정법은 재고용 시 별도의 출국 없이 동일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게 했지만, 이들은 1년이라도 더 연장하고 싶은 바람이 역력했다.

“저희 이슬람 나라들은 자이언트 패밀리(대가족)예요. 집안 전체를 대표로 나왔기 때문에 더 많이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라호르에서 왔다는 칸(33세) 씨는 직계가족 12명과 친척까지 25명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주야 맞교대로 12시간 일하면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버는데 그 중 70퍼센트를 본국으로 보낸다고 한다. 요즘에는 원화 가치가 하락해서 예전만 못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슬람은 곧 예언자 무하마드가 일렀듯이 ‘가족을 부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가족 중에 병이 들고 노동력이 상실된 경우나, 혼자가 된 누이, 여동생까지 부양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라고 했다.

“이슬람에 대한 흔한 오해 중에 하나가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이에요. 그것은 이슬람을 제대로 몰라서 하는 얘기예요. 다들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는 안타까움도 있어요.”

그러면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을 보라며, 그들이야말로 정말로 테러리스트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산악에서 밀가루로 만든 빵인 로띠(Rotti) 한 장으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미국은 절대로 아프가니스탄을 이길 수 없으며 러시아처럼 결국에는 철군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한다.

갑자기 아프가니스탄의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산들이 떠오른다. 척박하다는 표현보다도 광물질적이라는 표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마른 흙먼지만 날리는 곳에도 사람은 산다. 그런 곳에 다시 한국은 최근 파병을 결정했다.

“추악한 전쟁에 한국이 말려드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봐요. 한국이 베트남에서 했던 것을 생각해봐요. 언제 다시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해서 사죄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할 수 없잖아요. 평화요? 이슬람은 평화를 원해요. 자꾸 침략을 해오니 결국에는 자살테러까지 하는 것 아니겠어요?”

대화가 거침없다. 잠시 ‘짜이(Chai)’를 들고 들어온 틈을 타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기숙사 방에는 텔레비전 한 대, 옷장 두 개, 오디오 한 대 그리고 바닥에 양탄자가 전부다. 그 방 안에 다섯 명의 동료들이 잔다고 했다. 건장한 몸이 자기에는 턱없이 좁다. ‘비좁지 않냐’고 물으니 두 명 정도가 자면 적당하지 않겠냐고 되레 묻는다. 잠시 티타임을 맞아 컬컬한 목들이 짜이를 들이켠다.

내미는 손
다시 이야기는 고용허가제 개정으로 번졌다. 여전히 사업장 변경에 제한을 두는 것은 기본급을 동결함으로써 숙련 노동에 대한 임금 인상을 반영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이구동성이다.
“1년 차나 4년 차나 임금에 차이가 별로 없어요. 숙련공에 대해서 임금교섭권이 자율로 정해졌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4년 동안 일한 아밀(29세)은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가 회사에서 쫓겨난 일이 있었다고 했다.
“동료 서너 명이 기본급 인상을 요구했다가 법적으로 정해진 기본급 이상으로 줄 수 없다는 말뿐, 단체로 권리를 찾아 대응을 하면 그대로 계약해지 통고를 받아요.”

실제로 아밀은 동료들과 이틀 동안 근무 연수에 따른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가 ‘너희 나라로 가든지, 다른 공장으로 가라’며 계약해지 통고를 받았다고 했다.

“하루 일당이 8시간 기준으로 2만 7000원을 받고 있어요. 3만 2000원을 받아야 하는데 요구를 했다가는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어요. 갑자기 계약해지 통고를 받으면 황당해요. 생각해보세요, 갑자기 어디로 가겠어요. 불법체류를 하든지, 아니면 동료들의 기숙사를 찾아다니며 전전해야 돼요.”

내민 월급명세서를 보니 기본급이 법적 기준에 못 미쳤다. 거기에다 주말 특근수당이 일반 잔업수당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점심시간은 30분인데 초과 노동에 대해서 수당으로 지급된 내용이 명세서에 없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뛰어다닐 수밖에 없어요. 이런 문제를 가지고 회사 측에 답변을 요구하면 그냥 나가래요. 다른 곳으로 가라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죠. 우리는 외국인이니까, 갑자기 어디로 갈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주야간 맞교대로 받는 150만 원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다.

“이슬람 국가에서 이주노동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아요.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비자가 나오질 않아요. 유럽도 예전처럼 경기가 좋지 않아요. 중동 국가들은 70년대에 경기가 좋았지만 요즘 불경기라 그나마 한국으로 오길 희망하죠.”

카라치에서 왔다는 러쉬르(35세) 씨가 옆에서 거든다.
“어렵게 한국으로 왔지만 막상 생활하다 보면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아요. 부모가 돌아가셨거나 결혼 문제 등으로 휴가를 받아 본국으로 갔다 오고 싶지만 쉽지 않아요.”

그는 차라리 2년에 1개월쯤 휴가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쩌다 동료들 중에 15일 정도 휴가를 받고 고향을 다녀오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죠.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을 빼고 나면 겨우 일주일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돌아와야 해요. 정작 할 일도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같은 나라의 경우 이주노동자에게 휴가를 충분하게 줘 결혼도 하고 가족들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주노동이 희생이 따르는 일이지만 꼬박 5년간의 이주노동 기간으로 돈을 만질 수 있다. 반대로 본국에 있는 동료들과 격차가 벌어져 정착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했다.

“임금 조건에는 70퍼센트 정도 만족해요.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귀국했을 때 편의점이나 중고 자동차 사업 등을 할 계획이지만 인생이란 모르잖아요. 다만 차별은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모든 일에 슬픔과 기쁨이 동시에 있잖아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지하철이나 높은 빌딩 같은 낯선 광경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 한국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들이 느껴질 때면 마음의 상처도 많이 입어요. 일자리 때문에 고용지원센터에 가면, 절박해서 가는 건데 기다리는 시간에 비해 대답은 간단해요. 말이나 행동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경기도 광주에서 왔다는 샤마슈(23세) 씨가 산재를 당했다며 손을 내민다. 내민 손의 검지 마디가 없다. 한국에 들어와 일주일 만에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리는 산재를 당해 병원에서 2개월 동안 있었다는 그는 자신의 산재 처리가 궁금했다. 월급이 입금되었다는 통장을 보여주었는데 합의금은커녕 산재 처리도 되지 않았고, 통상 임금의 70퍼센트 선에서 임금이 지급된 채 종결되었다. 날씨가 추워지자 손마디가 쑤신다며 계속 치료를 받고 싶고 보상도 받고 싶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한글로 된 서류를 내밀면서 사인을 요구했는데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냥 사인을 하면 된다는 거예요. 결국 사인을 했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을 보니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산재 처리를 요구하라는 말을 들은 그는 광주로 가는 마지막 전철을 타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슬람은 고통을 함께하겠다는 생각이 커요.”
이슬람의 신년제인 ‘무하람(Muharram)’ 기간이 다가온다고 했다. 이슬람력으로 정월 초하루인 이 날은 무슬림들에게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 등 고행을 자처한다.

16년 동안 한국에서 이주민으로 살아온 무슬림 시아파인 자베드(45세) 씨는 매년 무하람 기간에 고행을 해왔다고 한다. 자신의 등짝에 내는 일종의 자해는 순교자의 억울한 죽음을 함께 나누고, 고통을 통해 순교의 참뜻을 이해하고 순교를 애도하는 기간이라고 했다.

“무슬림에게 종교와 가족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어요. 불행한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고통을 함께하라는 무하마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모든 무슬림의 의무죠. 이 모든 것이 무엇보다도 평화를 갈구하는 의미가 있어요. 헤어질 때 인사말에도 있잖아요, ‘굿다하 피스’ 하고. 그게 ‘집으로 가는 길에 신이 당신을 보호해줄 것이다’라는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잖아요.”

언젠가 이주노동자에게 배운 우르드어로 된 말이 생각났다. ‘압꼬 테끄라오게또 누니아메 지오게 께세.’ ‘우리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초저녁 모임이 벌써 자정을 향해 간다. 몇몇은 내일 작업을 위해 눈이라도 붙인다고 나가고 몇몇은 일을 끝내고 늦은 저녁식사를 위해 로띠를 만들러 식당으로 갔다. 자리를 접고 일어나려고 하니 로띠를 먹고 가란다. 그러고 보니 저녁을 먹지 못했다. 손을 씻고 오니 조촐하게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따뜻한 로띠를 손에 쥐자 뭐라 말할 수 없는 정이 통한다.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자리를 털고 기숙사를 나오니 칠흑이다. 밤하늘을 보니 별들이 어둠 속에 박혀 반짝인다. 몇몇의 이주노동자가 기숙사로 향한다. 발자국 소리가 공명하며 공단의 어둠 속으로 파묻혀 사라진다.
“굿다하 피스!”



글쓴이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다.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72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아빠 제발 잡히지마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이란주 (삶이보이는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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