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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시민 K씨


시민 K씨


이세기



귀화자의 비애
그를 시민 K씨라고 부르겠다. 시민 K씨의 나이는 38세. 한국에 들어온 지 7개월째다. 그에게는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딸과 이제 막 백일이 지난 딸아이가 있다.

그는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40여 가구가 벼를 심고 농사일을 하는 촌이다. 그곳은 군산에서 태어난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가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어 길림(吉林)을 거쳐 정착한 곳이다. 성자촌에서 정착한 가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한국으로 오기를 포기하고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농사일을 하며 살았다.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상급 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녕안시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것이 가족과의 이산(離散)의 시작이었다.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녕안시를 떠나 천진(天津)에 있는 의류 업체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그의 유랑은 마카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아일랜드를 거쳤다. 그 와중에 연변 출신 조선족 부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귀화를 위해 한국에 오기 전 10년 동안 일본에서 딸을 낳고 반도체 기술자로 일을 했다. 벌이도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는 대처로 떠돌던 38년간의 부초와 같은 유랑을 마치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귀화를 결심했다. 일본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2009년 겨울 추위가 풀리기 시작하는 2월 마지막 주, 큰딸의 새 학기에 맞춰서 그의 가족은 일본 나리타[成田]를 떠났다.

그런데 한국에 온 지 이틀째부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아파트를 사고 싶어도 계약이 안 됐고 주소지 신고를 위해 동사무소에 갔으나 주소지 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 딸아이의 입학을 위해 관할 초등학교에 찾아갔으나 역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교육청과 관할 소재의 초등학교 교장을 만나 참관수업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애원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수기를 설치하는 것조차 외국인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계약 판매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아야 했다. 매달 결제하는 대금 인출 통장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는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못해 찾아온 한국이라는 나라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동차를 사는 것조차 제약이 따랐다. 경차를 사도 세금이나 기름 값 감면이 되지 않고 유류할인카드조차 발급받을 수 없었다. 물건을 사고 세금을 내는 데 내·외국인이 무슨 상관이냐는 항변도 통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가족을 위해 의료보험을 만드는 것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에 구청과 출입국, 법무부에 찾아갔으나 되돌아오는 말은 “가족이 없는데요”라는 것이었다. “왜 내가 가족이 없느냐”고 했지만 외국인의 귀화 신청은 개개인으로 분리 등록하기 때문에 가족이 될 수 없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히려 귀화 신청을 위해서는 유전자 검증 서류와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중국의 외교부 공증을 통해 가족관계증명서를 국적과에 제출했지만 여전히 가족관계증명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그는 그동안 가족이 함께 거주했던 일본에 다녀와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제출한 가족관계증명서로 인해 겨우 의료보험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는 이 일을 겪으면서 재중동포인 한국인이면서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새삼 피부로 느꼈다.
“이유가 없었어요. 외국인이라서 못 해주겠다는 대답뿐이었어요.”

가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조차 거대한 벽을 느껴야만 했고, 사사건건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집 계약은 물론이고 아이의 교육, 그리고 가족의 의료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암초였다.
“나도 세금을 내며 물건을 사는데 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안 되는 것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외국인이 물건을 사면 세금을 환불해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의 항변에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왔던 설움보다 더 깊은 상처가 배어 있었다.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이 제 나라에 찾아왔는데 외국인 취급을 하는 것도 서럽지만, 한국에 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외국인 귀화자에 대한 온갖 차별이 심각함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도 외국인 취급받는데 외국인은 오죽하겠어요?”

그런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비자였다. 그가 받은 가족동거비자인 F1비자로는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결혼 이민자의 경우 자유롭게 구직 활동이 가능하지만 정작 귀화자인 경우 F1비자로는 국적취득 기간까지 구직은 물론 취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일을 할 수 있는 H2비자가 있다 해도 건설업이나 서비스업 등으로 취업 활동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가 지금까지 해온 반도체 관련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로 인해 국적취득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최소한 생계유지는 할 수 있도록 취직의 자유는 줘야 하지 않겠어요. 생각해보세요. 국적을 취득하는 동안 일을 못하는데 어떻게 먹고살겠어요.”

그는 억울해 했다. 이를테면 귀화자의 입장에서 일처리를 하지 않는 법무부에 대한 분통이기도 했다. 출산율이 최저인 한국에, 그것도 재중동포인 한국인이 가족까지 모두 귀화 신청을 하겠다는데 국가에서 적극적인 지원은 못 해줄망정 가족을 위해 직업을 갖는 것도 어렵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국적취득을 빨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래서 재중동포이기 때문에 특별귀화 대상자인 그는 귀화 대기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법무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국적취득과 연계한 사회통합교육을 신청했다. 국적 필기시험을 면제시키고 국적취득 대기 기간을 단축한다는 명목으로 실시하는 사회통합교육은 결혼 이민자의 국적취득을 손쉽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결혼 이수제의 일환이다. 그는 다문화 이해 교육 50시간과 한국어 교육 100시간을 꼬박 들어야만 했다.

“결혼 이수제로 국적을 취득하는 많은 사람들이 재중동포들이에요. 동포들의 경우 의사소통이 다 되는데 사회통합교육을 일방적으로 들어야만 해요.”
재중동포나 고려인의 경우 특별귀화 대상자로, 대기 기간이 2년 3개월로 단축되어 그나마 일반 귀화 대상자보다는 나은 형편이지만 국적취득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되겠느냐며 동포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 비애를 느낀다고 했다.

나는 시민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덕적도에 가기 위해 배를 타려고 표를 구했지만 인천 시민의 경우 뱃삯이 반값인데 비해 저는 뱃삯을 전부 내야만 했어요. 인천에 거주하는 시민인데도 외국인이기 때문에 뱃삯을 할인해줄 수 없다는 게 이유였어요.”

게다가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임신 8개월이었던 아내가 둘째 아이만큼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출산 일정을 맞춰서 왔지만 출생신고조차 외국인으로 등록해야만 했다. 한국에서 둘째 아이의 출생신고를 받아줄 곳은 없었다. 결국 그는 이전 거주지였던 일본에 가서 출생신고를 해야만 했다.

“일본에 가서 둘째 아이 출생신고를 하니 출산 비용으로 35만 엔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 아이의 외국인 등록을 위해 구청에 가서 신고를 하니, 둘째 아이 출산 비용으로 2만 원을 주더군요. 가족까지 데리고 와서 귀화하겠다는데 한쪽에서는 어서 오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귀찮아하는 거예요.”

아이는 결국 외국인 신분이 되었다. 출입국과 법무부에 문의를 했지만 한국은 혈통주의기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가 외국인 신분이라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국적취득하고 난 후 아이 역시 국적취득 절차를 밟으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법대로’만 있지 융통성이라고는 한 치도 없었다. 그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한국인이기를 꿈에서조차 잊지 않았던 곳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 수치심마저 들었다.

“그동안 몇 개월을 보내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런 거죠, 아하! 한국 사회는 이렇구나.”
그는 이렇게 한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그게 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한족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죠. 중국에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때로는 한족 친구들과 대립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는 소수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어요. 성년이 되어 해외를 떠돌면서도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나라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 국적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에 가족과 함께 찾아왔지만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한편 그는 ‘조선족’으로 불리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족 하면 마치 돈이나 벌려고 들어온 사람들로 취급해버려요. 같은 동포 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는 ‘재중동포’로 불러주길 바랐다. 동포로 대접해달라는 것이다. 외국을 떠돌며 온갖 설움을 받다가 같은 언어를 쓰는 나라에 왔지만 외국인으로 취급당하고 조선족이라고 불리며 멸시와 차별을 받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도 시민이잖아요.”

그는 귀화자 이전에, 외국인 이전에 사람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시민적 권리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거부되거나 제한받을 때 느끼는 인간적인 모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모든 외국인이 한국에 살려고 왔다면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권리가 동시에 주어져야 한다고 봐요.”

그는 취업할 자유도, 집을 살 권리도, 차를 소유하고 할부할 권리도, 아이를 낳아 출생신고를 할 권리도 없었다.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별이 이처럼 견고하게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 적도 없었다. 자신이 지난 몇 개월간 직접 겪은 일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대가 치고는 너무나 많은 인간적 모멸과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다고 하소연했다.
“제가 중국에서건 일본에서건 시민으로서 살아온 모든 권리가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의 말처럼 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시민권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이주노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베트남, 방글라데시, 태국 등 어느 나라에서 왔건 상관없이 그들이 자국에서 누렸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가 그대로 실현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모든 외국인의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직장을 구하기 위한 자유로운 구직 활동은 물론, 임금 교섭권이나 교육권 등 모든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는 현행 이주 정책의 문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화되고 점차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이주가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권을 제한하는 것 자체가 혈통주의만 고집하는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통합교육이 귀화자가 한국 사회에 적응하여 정착하는 것을 돕는 제도지만 일방적으로 통합하려는 의지만 있지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면 모든 것이 제한된 폐쇄적인 사회를 보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는 시민 K씨의 말은 헛말이 아니다.

그는 한국의 혈통주의가 결국은 다문화 사회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다문화 사회를 외치고 있지만 혈통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외국인은 그저 난쟁이와 같이 한없이 작아지도록 강요받는 국외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민 K씨는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이 앞으로도 나와 같은 처지인 재중동포가 겪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의사표현을 마음대로 못하는 외국인이 이토록 수모를 겪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냐”며 “한국은 모든 외국인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시민 K씨의 항변이었다.


글쓴이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71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아빠 제발 잡히지마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이란주 (삶이보이는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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