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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갈 곳 없는 이주청소년

이세기


방에 갇힌 아이들


벌써 세 번째다. 중국에서 온 장리(여, 16세)를 만난 것이. 장리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평소에 알고 있던 이주민으로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온 결혼 이주여성이 있는데,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만나잔다. 함께 찾아간 집은 전철 철로변에 닥지닥지 붙어 있는 연립주택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앳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문을 열어준다. 이름을 묻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다. 그저 웃음뿐이다. 아이의 어머니인 왕홍위(42세)씨가 딸이라고 한다. 한국에 온지 3개월밖에 안되어 말을 할 줄 모른단다. 장리가 공책에다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썼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딸과 함께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한 왕홍위 씨는 2005년 결혼 이주로 한국에 왔다. 그녀는 하얼빈에서 손재주 좋기로 이름난 미싱공이었다.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옷감을 만지며 일을 했지만 생활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 이주를 결심했다. 이혼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살 길이 곤곤한 그녀는 결혼 이주라는 새로운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딸이었다. 남편과 결혼을 하여 장리를 낳지만 부부간의 금술이 좋지 않아 일찍이 이혼을 했다. 그런 연유로 장리는 산둥(山東)에 있는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한국으로 결혼 이주를 하자, 얼마 후 부양하기 힘에 겨운 할머니를 떠나 한국으로 왔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이었다. 고등학교를 들어 가야할 장리를 받아 줄 곳이 없었다. 가족 동거비자이기 때문에 더더욱 학교를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첩첩산중이란 표현이 딱 들어 맞았다. 가족이 헤어져 산다는 것도 이젠 지쳤다.


한국에 온 장리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한국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구사능력이 필요했다. 가족동거비자도 비자지만, 한국어 구사능력이 없다 보니 학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 터에 모녀가 한국어 공부를 요청한 것이었다. 이렇게 만난 장리에게 한국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방문수업을 주선했다.


1년이 지났다. 다시 장리와 만나게 된 것은 중국 대련에서 온 유수위(남, 17세)를 만난 후였다. 유수위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2006년,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한국으로 부득불 함께 왔다. 중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싶었지만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는 한국에 와서 고등학교에 편입해 학교에 다닐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 꿈은 얼마 못가서 포기해야만 했다. 그를 받아줄 학교가 없었다. 화교학교가 있었지만, 학비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정작 대만식 교육제도로 인해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한국의 학교에서 그를 받아줄 리 만무다. 한국어로 말하기, 읽기, 쓰기를 하지 못하는 그가 있을 곳이 없었다. 결국 학업을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배울 데가 없었다. 답답한 나머지 기술이라도 배우고 싶어 인근의 자동차기술학원이라도 등록을 하고 싶었지만 한국어를 모르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종일 인터넷에 매달렸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지만 한국어 의사소통도 어려운데다 미성년자 신분이라서 어느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방에만 있는 것이 너무 지루해요.”


갈 곳이 없는 그는 대낮에 집에 있는 것이 무엇보다 괴롭다고 한다. 인터넷을 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는 다시 고향 따이렌(大連)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중국에는 그나마 친구들이 있다.


유수위의 얼굴에 그늘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 민감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그가 무료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래 친구는 물론 함께 고민할 이웃한 친구도 없다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공장이나 가서 일이나 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와 양아버지가 일을 나간 시간에 혼자 집을 지키느니, 차라리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속이 편하지 않겠냐고 내게 물었다.



보이지 않는 미래

유수위를 만나 고민을 듣게 되자 장리의 안부가 궁금했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되어 다시 찾아 갔다. 그새 이사를 했다. 공단 쪽방의 방 한 칸을 빌려 장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왕홍위 씨와 장리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둘 다 얼굴이 밝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남편의 알코올 중독이 심해 별거 중이라고 했다. 딸애의 교육상 좋지 않다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직업소개소를 통해 핸드폰 조립공장에 취직을 했단다. 요즘은 일이 많지 않아 60만 원정도 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장리다. 왕홍위 씨가 생활을 위해 공장에 다니게 되자 엄마가 공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한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했다. 한국에 온 지 2년 째 되어가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낯설어 혼자 다닐 수 없단다. 그나마 한국어 공부를 위해 다닌 다문화가족지원센터도 1, 2월 달이 방학이라서 오고 갈 데가 없단다. 두어 평쯤 되어 보이는 방에 있는 컴퓨터와 텔레비전이 유일한 친구처럼 보였다.





방 한 구석에는 장리가 배운다는 한국어 교재가 가방에 들어 있었다. 그동안 한국어를 배워 묻지도 않았는데 더듬 더듬 말을 한다. 장리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학교로 생각하고 다닌다고 했다.


이야기 하는 도중 장리는 두통을 호소했다. 가끔씩 방문을 열어놓고 환기를 하지만 두통이 심하다고 했다. 방안에만 있어서 그러냐고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팔뚝을 보여준다. 아토피였다. 내가 물었다. 중국으로 가고 싶지 않느냐고. 장리는 그래도 어머니가 있는 한국이 좋단다. 하루빨리 한국어 수업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나마 외출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했다. 그동안 배운 한국말로 장리가 말했다.


“기술이라도 배웠으면 좋겠어요.”


그런 장리를 보는 왕홍위 씨는 속이 탄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지만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왕홍위 씨는 아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국 아주머니를 보면서 자신의 아이의 장래에 대해서 걱정이 앞선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아이의 미래는 어둡지 않겠냐며 우려했다. 그런 우려는 비단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재혼한 부모를 따라 입양형식으로 들어오는 이주청소년이 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주청소년들이 갈 데가 없다. 장리의 경우도 처음엔 공교육을 통해 교육을 받기를 원했으나 한국어를 전혀 몰라 정규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입시교육 위주의 교육현실에서 이주청소년들이 갈 곳은 더더욱 없다.


장리는 결국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지만 그것이 교육의 혜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겨우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보니 이주청소년들이 갈 곳은 방 안 밖에 없다.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요.”


그녀의 인생이 수레바퀴와 같이 끝이 없어 보인다. 중국 변방의 사막에서 불어오는 칼칼한 모랫바람 같이 인생살이가 황량해져만 간다. 아이에게만 그런 인생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냐며 그녀는 시선을 한동안 돌렸다.


결혼 이주를 통해 함께 온 이주청소년은 그런대로 사정이 좋다. 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를 따라 한국에 왔다가 미등록이 된 이주청소년은 항상 불법단속의 두려움 속에 있어야 한다. 마음대로 외출도 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거개는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공장 기숙사 등에 방치된 채 생활하고 있다. 부모와 함께 미성년자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일홈(남, 17세)의 경우 1년 째 어머니와 함께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최근 그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렸다. 목재공장에서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산재처리가 돼서 그나마 치료는 받았지만 두 손가락이 잘린 그의 앞날은 걱정스럽기만 하다. 치료가 끝나면 귀환하겠다고 했지만, 교육을 받아야할 나이에 이주노동으로 내몰린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함이 전해졌다. 택시운전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그는 잘려진 손가락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의 처지가 믿기지 않는 듯했다. 그의 눈빛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막장을 경험한 것처럼 보였다. 현실의 암담함과 좌절이 눈물로 배어 있었다. 그는 치료가 끝나는 대로 하루 빨리 귀환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주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나 아니면 특별학급을 편성했으면 좋겠어요.”


결혼이민자 자녀 뿐 아니라 이주노동자, 난민 및 무국적자의 자녀 등 체류자격에 상관없이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이주아동 및 청소년의 교육권 보장이 무엇보다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왕홍위 씨를 비롯하여 많은 이주노동자나 결혼 이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공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대안학교나 아니면 특별학급을 편성해서 운영해 주길 원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과 따로 떨어져 공부하는 것을 원치 않지만 민감한 청소년기에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약점으로 인해 역차별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아직 한국 사회가 이주청소년에 대해서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정책이 부재한 것도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설이 지나 정월 대보름 전날에 왕홍위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설음식을 함께 먹자는 것이다. 왕후위 씨는 탕위엔(湯圓)이라는 중국식 떡국을 끊여 주었다. 다시 만난 장리는 하루 빨리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가져간 부럼을 깨물며 바라본 창가에 보름달이 마냥 환하다.



* 2003년 1월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정부가 모든 외국인 아동의 교육권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보장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아직도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에 대해서 비준하고 있지 않고 있다.


한편 2008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체류자격에 관계없이 전입학이 가능하도록 미등록이주자의 자녀에게도 의무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민자 자녀 중심의 다문화정책이 전개되고 있어 아동 및 이주청소년이 자국문화를 향유하고 교육받을 권리의 보장이 미흡할 뿐 아니라 학교생활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67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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