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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당신, 꿈에 와주세요

당신, 꿈에 와주세요


이세기


실라 씨의 눈물
실라(44세) 씨는 한국에서 17년간 여성노동자로 살았다. 처음 5년 동안 무려 열여섯 군데의 공장을 전전했고, 최근까지 다닌 공장에서는 10년간 검사반에서 일했다. 철새도 아닌 그녀가 열일곱 군데의 공장을 다닌 사연에는 사뭇 눈물이 배어 있다. 이유인즉 그녀의 아들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올해 공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은 그런 문제쯤 아무 일도 아니지만 당시 돌을 막 지난 아이의 의료보험증을 만들기 위해 선택해야만 했던 시름겨운 신산한 삶이었다. 그녀는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비참했던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남편과 3년 조금 넘게 함께 살았는데, 백혈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었어요. 그때 우리 아이가 17개월이 막 지난 무렵이었어요.”

1992년이었다. 관광비자로 한국을 방문한 그녀는 아르바이트 제의를 받아 한 달 동안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플라스틱 성형을 하던 회사였는데 공장 대리로 있었던 남편을 만난 것이다. 그녀가 필리핀으로 돌아간 후 어느 날 남편이 여름휴가를 받아 찾아왔다. 그리곤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처음에 집안에서는 한국 남자와의 결혼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 문화적인 차이로 인한 불편함이 이유였다. 하지만 한 달 내내 이어진 남편의 끈질긴 청혼으로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으로 왔다.

그녀의 신혼 초는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부푼 꿈으로 가득했다. 대다수 결혼 이주 여성이 그렇듯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낯설긴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행복했다. 평소에 술을 즐겼던 남편은 친구를 좋아하고 공장 생활에 만족하며 유쾌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여느 부부처럼 첫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행복을 시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에게 남편의 죽음이라는 불행이 찾아온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결혼 초에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어요. 간단한 인사말 정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죽자 모든 것을 저 혼자 힘으로 해야 했어요.”

함께 살던 시동생은 집을 나갔고, 시누이와도 연락이 끊겼다. 남편은 죽기 전에 병상에서 자신이 죽으면 아이는 자기 누나에게 맡기고 새로 시집을 가서 잘 살라고 유언을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남편이 말했어요. 자신이 죽더라도 친구들이 잘 돌봐줄 거라고.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찾아오던 친구들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어요. 심지어 친척조차 찾아오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외국인이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모두 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어요.”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필리핀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현실적인 여건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아이의 우유 살 돈도 없었어요.”

일주일에 200만 원씩이나 하는 남편의 병원비를 대느라 그나마 남아 있었던 퇴직금조차 한 푼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니던 성당 수녀님의 도움으로 겨우 아이의 우윳값과 월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처음 일한 곳은 영어 학원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이나 호주 출신의 강사들은 급여가 높은 편이었지만 저 같은 경우는 필리핀 사람이라서 시간당 5000원에, 그나마 강의도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주었어요. 월 50만 원으로는 월세에 아이 우윳값, 어린이집 탁아비를 낼 수 없었어요.”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월세라도 안정적으로 내기 위해서는 고정급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로는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녀가 선택한 것이 공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공장 생활이 시작됐다.

“5년간 공장을 열여섯 군데나 다녔어요.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의료보험증을 만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3개월 정도 다니다가 의료보험증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그만두고 다른 공장으로 가곤 했어요. 거기에다 공장에 출근하려면 7시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겨야 했어요. 그런데 그 시간에 맡아주는 어린이집이 없는 거예요. 사정을 얘기해서 겨우 아이를 맡기긴 했지만, 저녁 7시면 찾아와야 하는데, 어느 공장에서는 강제로 잔업을 시켜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없었어요. 그런 날은 온통 마음이 시커멓게 타는 것 같았어요. 목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할 수 없이 공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공장에 가서 또 잔업으로 아이를 못 찾게 되면 그만두고 그렇게 열여섯 군데 공장을 다녀야 했어요.”

그때는 사는 것이 그야말로 전쟁이었다고 했다. 아침 7시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저녁 7시까지 곧장 와서 아이를 찾아 집으로 데려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아이도 자신도 지쳤다. 결국 아이를 필리핀에 있는 친정으로 보내야 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내내 단 한순간도 아이를 잊을 수 없었다. 눈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점점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끝없이 일해도 허덕이는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부모에게 실패한 삶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아이에게 실패한 삶을 물려주는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그녀는 더욱 악착같이 미궁 같은 삶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아이가 일곱 살 때였어요. 아이는 필리핀 여권이 없었어요. 한국 아이잖아요. 여권도 없고, 한국 사람이라서 필리핀 공립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었어요. 결국 학교에서 안 받아줘서 다시 한국으로 데려왔어요. 또, 나는 엄마니까. 아이가 보고 싶어서 다시 데려왔어요. 그리고 직장을 다니기 위해 다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겼는데, 매일 혼자 집에 있어야 했어요. 토요일은 어린이집이 안 열어서 혼자 있었어요. 그게 가장 가슴 아팠어요. 그럴 때면 이렇게 얘기했어요. ‘엄마는 회사 가니까 너 혼자 있어야 해. 무슨 사고 나면 그냥 밖에서 기다려.’ 불이 나거나 하면 무조건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그냥 나가라고 했어요. 어떤 날은 어쩔 수 없이 9시쯤 퇴근하는데 그때까지 아이는 혼자 기다리면서 밥을 굶었어요. 이웃 사람들이 딱해서 엄마한테 종이쪽지를 남기고 함께 가서 밥을 먹자고 했지만 싫다고 했대요. 엄마는 한국말을 못 읽는다면서요. 엄마가 집에 오면 문 열어줄 사람이 없어서 아이가 기다렸어요. 음식도 제대로 먹여준 적이 없었는데, 가슴으로 큰 것 같아요.”

나, 꿈 있어요
그녀는 최근 무역 회사에서 통역 일을 시작했다. 10년 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10개월간 고용보험 수급자로 생활하다가 고용지원센터에서 마련해준 회사에 취직했다. 그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월세를 전전하다가 그간 저축한 돈과 퇴직금으로 전세를 얻어 나왔다. 그때 돌이 지났던 아이는 지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동안 배우지 못한 한국어 공부도 시작했다.

“제가 한국에 온 17년 전에는 요즘처럼 결혼 이주 여성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요. 한번은 고용지원센터에서 재취업 서비스로 요리 학원을 권해 줬어요. 학원에 갔는데 강의하는 내용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저만 따로 가르쳐줄 수도 없고, 결국에는 포기해야 했어요. 그때 알았어요. 한국어를 공부해야겠다고. 그래서 고용지원센터 상담하는 분에게 말했어요. 저 한국어를 배우게 해주세요.”

그녀에게 지난 17년 동안 행복했던 시절을 꼽으라면 남편과 살던 신혼 초와 재취업 기간 동안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한국어 공부를 할 때였다고 한다. 같은 처지에 있는 결혼 이주 여성들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비로소 아이 엄마가 된 기분이었어요. 학교에 가는 아이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일이 너무 좋았어요. 아이에게 음식을 해 먹이고, 그토록 배우고 싶은 한국어도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녀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구직 기간 동안 직업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서 결국 포기해야만 했던 일은 아쉽다고 했다. 자신처럼 한부모가정의 경우 직업재활교육이 필요하지만 정작 직업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의사소통이라고 했다. 외국인이라고 특별히 대우를 해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안 되는 결혼 이주 여성에 대한 배려는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 온 지 10년 넘은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말을 못해요.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없었으니까요. 앞으로 계속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지만 저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은 배울 기회가 거의 없어요. 요즘 집으로 찾아오는 방문 교육도 있다는데, 한국에 온 지 3년 이하의 여성이 우선이래요.”

실라 씨는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해서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동사무소 가면 외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자세히 안 알려줘요. ‘뭐 필요해요? 쌀 필요해요? 돈 필요해요?’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가기가 싫어요. 갔다 오면 너무 상처를 받아요. 동사무소에 일 준다고 해서 갔는데, 제대로 못 물어보니까 결국에는 상처만 받고 와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이 떠오른다고 했다.

“지금도 사랑해요. 너무 따뜻했어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어요. 근데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꿈에 나타나요. 좋은 일 생기면 무서운 얼굴이 아니라, 깨끗한 얼굴로 나타나요. 지금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생각나요.”

그녀는 지금도 가끔씩 꿈에서 남편을 만난다고 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꿈에서라도 남편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특히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날이면 남편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혼자 살면 사람들이 농담을 해요. 그런 거 싫어요. 남편 없으니까. 심지어 사람들이 함께 살자고 해요. 혼자 사니까, 남편 없으니까. 남편 없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자꾸 함께 살아, 도와줄게 하면서 성적으로 놀려요. 어떤 사람은 2만 원 줄 테니 함께 자자고 해요. 젊은 애들이 야근할 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그럴 때는 너무 힘들어요. 여러 사람 중에는 나쁜 사람도 있어요. 외국인이라고 해서 안 좋은 생각, 안 좋은 말 하는 사람 있어요. 외로운 밤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줘. 외로운 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대답 안 해요. 나중에 알았어요. 그럴 때는 정말 죽고 싶어요.”

이런 상처에 비하면 고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고생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몸이 건강하고 아이도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했다. 이보다 더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고, 넘은 고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온 힘이 자신이 어머니이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생은 누구나 하는 거예요. 돈은 벌면 돼요. 건강하니까. 공장에 다니면서 손가락 없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어떤 사람은 열 손가락이 없는 거예요. 그래도 살아요. 못 먹으면 다 같이 배고파요. 하지만 다 함께 먹으면 다들 배부르잖아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지금도 옛날 생각이 나요. 옛날에도 회사에서 일할 때, 잔업이 있어 늦게 가면 아이가 먹을 게 없었어요. 혼자 굶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잔업을 해서 시장도 못 갔어요. 하지만 라면하고 쌀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배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지금까지 꿈조차 꿀 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했다.

“어느 날이었어요. 구직 활동을 하기 위해 고용지원센터를 갔는데, 내게 묻는 거예요. ‘실라 씨, 뭐하고 싶어요? 꿈 있어요?’ 그때 순간적으로 생각했어요. ‘아, 맞아, 나 꿈 있어요.’ 그것도 잊고 살았다가 그때 기억이 났어요. 17년 동안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예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꿈이 있었어요. 요즘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보고 싶은 당신, 꿈에 와주세요. 제발, 내 꿈을 이루게 해주세요’ 하고 빌어요.”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다. 아들이 내일 학교에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내린다. 그녀의 얘기를 듣다 보니 17년간의 생활이 어두운 터널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이제 겨우 빠져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터널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책임만은 아닐 것이다. 아득바득 악다구니하며 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어쩌면 우리네 삶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녀에게 “꿈이 뭐예요?” 하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음에 말해줄게요.” 그녀의 대답이었다. 다시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꿈이 하나쯤 있을 터이니. 언제 다시 만나면 그 꿈을 들을 수 있을까. 이쯤에서 생각을 끊었다. 차창으로 봄비가 떨어져 번졌다. 봄의 초입으로 향하는 비다. 겨울을 떨친 비가 그치면 봄이 더 가까이 올 것이다. 낮에 보았던 라일락의 씨눈이 떠올랐다. 이제 막 봉오리를 맺고 있는 씨눈들도 이 꽃샘추위를 통과하면 제 모습을 내밀며 꽃으로 이파리로 피어날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뇌리에 물방울처럼 맺혔다.

“나, 꿈, 아직 있어요.”


글쓴이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삶이보이는 창>73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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