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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솔롱고스를 떠나는 아이




이주민 몽토야 부부

손세차장에서 일하는 몽토야(37살) 씨는 한국에서 10번째 여름을 맞고 있다. 그 사이 큰 아들 서타밀(7세)이 태어났고, 최근 볼강타미가 태어났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서타밀은 또래 아이가 그렇듯이 천진난만하다. 타밀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몽토야는 여러 가지 걱정을 했다. 아이가 또래와 잘 어울릴까, 왕따는 당하지 않을까 지레 걱정을 해야 했다. 그나마 타밀의 피부색이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이었다. 타밀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던 친구들이 몽골아이라는 것을 알자 그때부터 놀림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 얼굴색에 대한 혼란을 겪지 않았지만 어눌한 말씨 때문에 영락없이 아이들의 따돌림을 받기 일쑤다. 몽토야는 아이가 학교에 돌아오는 날이면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린다. 이제 갓 입학한 터라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몽토야는 타밀이 학교생활에 적응하길 바랄뿐이다. 타밀은 친구들과 가끔씩 싸우고 집에 들어오지만 다행스럽게도 건강은 타고난 터라 잔병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는 타밀에게 학교 다니기가 어떠냐고 물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재미있단다. 특히 음악시간이 좋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그냥 씨익 웃는다. 타밀에게 미소는 말이 된다. 워낙 말수가 없다. 말을 걸지 않으면 좀처럼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 토야는 그게 다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한 결과라고 했다.  

가끔 나는 토야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는다. 몽골 악기 마두금을 타고 들려오는 그 소리는 꼭 들판의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흩어졌다 모이고 어느 덧 뿔뿔이 사라지는 정처 없는 구릉 위의 구름이미지를 닮았다. 밤하늘의 별과 바람과 초원의 풀잎을 일으키는 소리 같았다. 가끔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노래방에 갔는데 가수 뺨을 칠정도로 한국의 대중가요를 잘 불렀다. 소주도 곧잘 했다. 소주를 먹으면 주정도 했다. 그의 주정에는 내력이 있다.

몽토야는 원래 몽골에서 농구선수였다. 국가대표선수로 러시아나 중국 등지에 가서 경기를 뛰었다. 남편인 서기 역시 스포츠 선수이다. 사이클 국가대표로 아시아게임 3연속 금메달을 받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스포츠 부부인 이들은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아 생활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1990년대 구소련이 해체되고 사회주의 경제가 몰락하면서 자본주의 시장체제로 변하자 연금으로는 생계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몽골에서는 벌이가 괜찮은 일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스포츠 영웅인 서기 씨는 1997년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으로 이주를 감행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몽토야 씨 역시 한국으로 이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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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해도 그녀는 스포츠 정신으로 무장한 터였다. 근성과 끈기로 단련된 몸이었다. 거기에다 기골이 장대한 그녀는 몽골인 특유의 다부진 몸매를 지녔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은 신산했다.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목재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그녀는 남자도 힘이 들어 손을 든다는 목취부에서 천신만고의 나락을 오고갔다. 그런데도 토야는 재미났다고 했다. 월급을 손에 쥐는 날이면 머지않아 이주의 꿈이 실현될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꿈이 있어 이주초기만 하더라도 뭘 먹어도 소화가 될 정도로 기운이 솟고 힘든지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타밀이 태어났다.

타밀이 태어날 때 몽토야 부부에게 가장 큰 문제는 병원비였다.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터라 의료보험이 없는 토야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운동을 그만 둔 이후 혈압이 높아진 토야는 출산통과 산후통으로 몸이 망가졌다. 타밀은 걸핏하면 잔병치레로 병원을 가야했다. 그로인해 그동안 번 돈은 병원비로 대부분 써버렸다.  

그렇게 타밀을 2년여를 키웠다. 그리고 정을 떼듯이 몽골에 있는 친정에 아이를 맡겼다. 그녀는 타밀을 몽골로 보내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토야는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이가 몹시 보고 싶었다. 타밀 역시 몽골에서 적응하지 못했다. 잠자리에 들어도 공장에 나가 일을 해도 아이가 눈에 밟혔다. 늦은 시간 집에 들어와 적적함을 술로 달랬다. 술에 취하면 아이가 생각나 남편에게 아이를 당장 데리고 오라고 떼를 썼다. 처음엔 남편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날이 갈수록 토야의 주정이 심해지자, 결국 몽골에 가서 타밀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이 다시 합쳐진 후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은 행복이 찾아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토야는 목재공장 도장반과 세차장 등에서 일을 했다. 남편은 몽골과 한국을 오가며 유목민 같은 생활을 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는 사이에 또다시 몽토야 부부에게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타밀과 타미의 이별


아이가 태어난 기쁨도 잠시 부부는 백일이 막 지난 둘째 볼강타미를 몽골로 보내기로 했다. 몽골의 강 이름 따서 지워준 이름처럼 아이가 강처럼 긴 생명줄을 잇고 살아가길 희망했다. 이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마음을 졸이는 일이다. 언제 단속될지 모르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신분은 아이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주노동자로 일을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타미를 몽골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은 몽토야에게 10년간의 한국 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제 일상이라고 했다. 벌어 놓은 돈도 없고 아프면 병원비 들고 먹고 살기 위해 산다고 했다. 몽골에 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이제는 한국의 날씨와 음식이 더 친숙하다고 했다. 몽골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자란 타밀은 이젠 몽골에서 살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토야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국에서 계속 살면 좋겠다는 속내를 비췄다. 타밀을 위해서도 한국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등록인 토야로서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아가리라는 보장이 없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녀와 타밀의 현실이다. 그로 인해 토야는 만성적인 불안과 두통에 시달린다. 혹시 아이 때문에 잡히는 것은 아닌지, 출입국으로부터 단속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되지라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꿈에서 조차 악몽처럼 따라 붙었다. 다행히 아이의 외모가 한국의 여느 아이가 별 차이가 없어서 밖에 나가서 놀 때 마음을 졸이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나마 방글라데시나 인도에서 온 이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경우 허다하게 공장 기숙사나 컨테이너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비해 자신들은 행운아라고 까지 했다.

아이 때문에 이중생활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지만 그것도 아이를 위해서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지금은 남편이 건축자재를 납품하는 일을 하면서 몽골과 한국을 오갈 수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몽골의 초원과 흰 구름이 떠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10년을 살아오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애증이 커졌단다. 여전히 지하방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지만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피로를 잊는다고 했다. 아이가 이곳에서 자라 사춘기를 맞고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어쩌면 그녀와 그의 가족은 몽골과 한국을 오가는 유목민의 생활을 계속해야 할 지 모른다. 정착을 꿈꾸지만 일을 찾아 시화공단에서 안산에서 그리고 인천의 변두리 공단을 전전하면서 이제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여느 한국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히려 타밀이 커가면서 이중의 문화와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을 겪지나 않을지 적이 걱정되기도 한다. 집에서는 몽골어를 하지만 타밀에게는 한국어가 오히려 자연스럽다.

왜 가족이 함께 생활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토야는 또 눈물이 글썽인다. 몽골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녀의 가족은 유목인이라고, 앞으로 타밀이 성장하는 환경 역시 유목인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그게 다 경제적인 이유지만 이젠 그 이유도 생활을 앞서지는 못한다. 현실 때문에 현실로 인해서 현실에 속박당해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불현듯 ‘아, 이게 묶여 사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예전에는 정착을 꿈꾸었지만 그 정착이라는 것이 토야에게는 새로운 속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꿈 때문에 이곳까지 떠밀려 온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타밀 때문이라도 몽골로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단다.

남편은 몽골에서 볼강타미를 키우고 토야는 한국에서 타밀을 키워야 한다. 어쩌면 이주노동 과정에서 새롭게 부딪치는 문제지만 그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고 경제적으로는 더욱 궁핍해졌다. 이주 초기만 하더라도 토야 부부는 한국에서 얼마간의 이주노동이 그들에게 새로운 꿈을 일궈 주리라고 믿었다. 몽골에 파오를 짓고 스포츠 관련 일을 하면서 부모를 모시고 살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다. 가족해체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하는 것도 힘겹지만 불법체류라는 낙인이 토야와 타밀에게 미래를 꿈꾸지 못하게 한다. 이는 비단 타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 사이에서 태어난 이주아동들은 공장의 기숙사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다. 가족이주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이주정책은 이주아동에게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부모의 체류 신분과 관계없이 국적을 부여하는 여느 나라와 달리 한국은 국적이 없으면 권리도 없다는 식의 이주정책을 펴고 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이주아동들이 부모의 선택과 무관하게 무국적자로 방치되거나 아니면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 사회가 이주민의 가족과 아동인권에 대해서 방치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사회가 야만의 경계에 있다는 지표이기도 하다. 가족해체를 낳는 이주정책의 변화 없이 이주문제는 값싼 노동력을 구하려는 각축에 불과하고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5월의 햇살이 눈부시던 어느 날 몽골로 타미를 보내기 전에 토야는 타미를 업고 타밀과 함께 나들이를 했다. 언제 볼 거라는 기약이 없는 터라 눈빛과 가슴에 아이를 넣느라 바빴다. 그리고 며칠 후 이제 막 백일이 지난 타미는 젖도 떼기도 전에 형 타밀과 헤어져 솔롱고스의 나라를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몽골 사람들은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른다. 솔롱고스는 ‘무지개 나라’라는 뜻이다. 이들에게 무지개 나라라고 불리는 솔롱고스는 어떤 나라일까. 비행기가 푸르른 창공을 향해 굉음을 내며 솟아올랐다. 토야의 눈빛에 원망인지 아니면 기다림인지 알 수없는 회한이 가득 밀려온다. “아기야 잘 가” 그녀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이 청한 하늘에 아리기만 하다.


*한국은 현재까지 유엔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38개국이 이미 비준한 이 협약에는 이주민의 권리가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이주노동자가 노동할 권리, 자유롭게 귀국할 권리, 가족을 동반할 권리 등이 핵심 내용이다.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에 관한 국제협약의 29조에 따르면 ‘이주노동자의 자녀는 성명, 출생 등록, 국적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제30조 이주노동자의 자녀는 그 나라의 국민과 평등한 처우를 기초로 교육을 받을 기본적인 권리를 가진다. 그 사람이 공립유치원 및 학교에 입학할 것을 요구할 때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이 체류 내지 취업이 불법이거나 취업국에서의 그 자녀의 체류가 불법임을 이유로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글쓴이 이세기는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한국아시아이주민센터>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63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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