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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이주, 삶은 불안하다

이주, 삶은 불안하다
- 귀환 이주노동자를 찾아서

이 세 기



1. 태국에서 온 이주노동자 사욍

사욍이 고향을 떠나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온 것은 그의 나이 28세였다. 태국 동북부 오지인 잠롱에서 한국으로 올 때, 그는 고향에다 땅을 사 연못이 딸린 집을 짓고 가정을 건사하며 사는 꿈을 꿨다.
그가 태어난 마을은 180여 가구 700여 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지방 국도의 조그만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몇 가구의 집이 흩어져 있고, 마을 입구에 초등학교와 보건소, 그리고 사원이 하나 있을 뿐 농사를 짓는 여느 태국의 농촌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농사를 짓는 부모에게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욍은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그들 또래가 그렇듯이 일자리가 없어서 무직으로 생활해야만 했다. 친구들의 거개는 방콕 등지로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대처로 떠났다. 그 역시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인근에 있는 가까운 소도시에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돈으로는 가족의 생활비는 물론 자신의 장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벌어도 그에게 남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생활고와 절망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으로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빚을 내어 9만 바트라는 거금을 송출 브로커 비용으로 주고, 마침내 1999년 고향을 떠나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왔다.
그가 처음으로 이주한 곳은 인천 5공단이었다. 그곳은 인천의 대표적인 기계단지로 주로 프레스직종이 몰려있는 공단이다. 그는 밤낮으로 일을 해 70여 만 원을 받으며, 5년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일을 했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계약기간인 3년이 지났는데도 귀환하지 않은 채, 미등록이주노동자로 계속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03년 불법체류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이후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화 조치로 구제되어 출국한 후 비전문직종인 E9비자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그와 만나게 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그는 인천 5공단에서 태국 이주노동자 네 명과 함께 사출직으로 일을 했는데, 다니던 회사에서 임금이 체불돼 상담을 받기 위해 나와 만났다. 그와 그의 태국 동료 네 명은 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공장은 폐업으로 문을 닫았다고 했다. 나는 회사에 전화를 걸고 사실 확인을 했는데, 사장은 여느 한국의 사업주와는 다르게 정중하게 노동부에서 만나서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노동부에서 만난 사장은 3D업종 사업주들이 그러하듯이 심한 자금난과 함께 클레임을 당해서 부도를 낸 상태였다. 다행스럽게 체당금까지 가지는 않았기에 그는 체불된 임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지급기일을 합의하고 헤어졌다. 그 후 몇 차례의 중간 정산을 거치면서 다섯 명이 받지 못한 체불임금 1,700여 만 원을 받았다. 그렇게 사욍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그 후, 그는 다른 태국 이주노동자와는 다르게 스스로 합법적인 구인을 포기하고 예전에 근무했던 공장에서 프레스 직종 일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상적으로 E9비자가 있는 그가 고용지원센터를 이용하지 않고 임금을 더 준다는 공장으로 가기위해 스스로 비자를 포기하고 미등록이주노동자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두 차례의 이주노동 과정에서 진 빚 때문에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준다는 공장에 찾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의 선택과 생활은 얼마 못가서 끝이 났다.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단속 과정에서 그는 강제출국을 당했고, 남은 잔여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한국에 들어온 지 1년도 안되어 태국으로 귀환해야만 했다.
그와의 짧은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은 때론 판타지 같은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때마침 귀환한 사윙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찾아왔다. 태국으로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나의 태국행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이주노동자를 위하여 도서관에 비치하기 위해 태국 책을 구해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인권여행의 일환으로 인도차이나의 몇 나라를 여행하면서 귀환한 이주노동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내게 다시 기억으로 되살아왔다.


2. 실어증, 카오산의 밤거리

방콕은 비가 내렸다. 우기의 비는 느닷없었다. 누군가는 우산이 필요 없다며 그냥 맞으면 된다고 한다. 우산이 괜한 짐만 될 뿐이라고 했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고 숙소로 정한 방람프의 거리에도 비가 내렸다. 비가 갠 날은 높은 습도 때문에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열대야의 더위는 묵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천장에서 도마뱀과 함께 내려왔다. 푹푹 찌는 더위가 무슨 전염병 같다. 세계의 인종이 모인 곳답게 더위를 피해 몰려든 카페에서는 젊음의 낭만이 밤새 식을 줄 모르고 열기를 내뿜는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이들과 섞이지 못하고 이 도도한 자본주의의 기세에 눈이 휘둥그래진 채 명멸하는 밤의 방콕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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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라롱컨대학 구내서점에서 책을 구하고 잠시 태국의 거리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뭐랄까, 마치 동굴에 들어서자, 신비한 세계가 열렸다. 온갖 알록달록한 진귀한 차들과 매연으로 그을린 도시의 건물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열대의 꽃들이 거리를 장식하고,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의 물결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차이나타운은 거대한 물결로 파도쳤다. 나는 내내 홀린 듯한 토끼 눈을 하고는 명명하는 거리의 불빛과 차들과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방람프에 넘치는 세계각지에서 온 여행객에게는 여유의 시간조차 허용되지 않은 듯, 시간이 질주하고 취해 흐느적거리는 밤이 짧기만 하다.
첫 번째 일을 끝내고 나는 드디어 귀환한 이주노동자 사욍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적어온 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연락은 두절이다. 몇 차례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시름했지만 그와의 통화는 실패했다. 대신 그의 여동생과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응답이 없다. 수화기에서는 태국말만 들려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낭패감이 밀려온다. 사욍과 통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그의 고향집까지 찾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방향상실이랄까,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 절망스럽다. 이러한 나의 절망이 이주노동자들이 이주과정에서 겪는 문제가 아닐까, 나는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다. 외지에서의 소통부재로 인한 고립감과 급작스러운 환경변화는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도 막막했으리라. 사욍도 그러했을 것이다. 아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혼자 있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맥주를 사서 여는 유럽의 배낭족처럼 방람프의 거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술은 한낮의 온도처럼 내 몸을 뜨겁게 달궜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도 없다. 나는 그 길로 비가 내리는 방람프 거리를 걸었다.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 심장이 뛰고 숨이 곧 멎을 듯한 기세다. 말의 침묵과 묵언이 이런 것인가. 이런 것이 바로 모국어를 할 수 없는 감옥의 신세이고 이주노동자가 겪는 고통이 아닐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메네트(41세)라는 이주노동자가 있었는데 실어증으로 정신착란에 빠진 적이 있었다. 이주노동을 온 지 3개월이 지난 후부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밤만 되면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공장의 창문을 넘어 어디론가 가려고 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신들린 채 말도 하지 않고, 벽을 손톱으로 긁거나 천장을 뚫어지게 보았다. 어느 날은 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동료들은 벽과 천장을 뚫어 보여주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러하려니 했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고 점점 심해졌다. 작업시간이 되어도 방에서 나오지 않고 괴성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며 날뛰자 공장 동료들은 그를 기숙사 방 안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드디어 정신착란으로 병원에 사지가 묶인 채 신경안정제를 맞고 며칠 동안 병원에서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해야만 했다. 병원에서도 호전이 없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늦은 밤 방람프의 거리에서 메네트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고, 모든 이주노동자가 겪는 실어의 고통이라고 생각하니, 답답함이 벼랑처럼 다가온다. 어둠 속에서 창문 밖으로 우기의 빗소리가 정처 없다. 간간이 빗소리에 섞여 사원에서 닭 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겨우 새벽 5시가 넘어서야 마음이 진정되어 잠시 눈을 붙였다.


3. 이주, 그 머나먼 길 위에서

인근 사원의 닭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니 또 다시 느닷없이 빗줄기가 쏟아진다. 공중전화통을 붙잡고 다시 사욍과의 전화를 시도했다. 사욍의 여동생과 겨우 연락이 되었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더 이상 사욍과의 만남은 어려울 듯싶었다. 나는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간밤에 극심하게 온 공황증도 그렇거니와, 점점 죄어오는 실어증은 나로 하여금 감옥에 다름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여행사에서 출국예약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차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다. 한국에 있는 태국 이주노동자의 중재로 겨우 사욍과 연락을 해서 내가 묵고 있는 숙소로 전화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잠시 있자니 전화벨이 울린다. 사욍이다. 반가운 목소리다. 그는 내게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란다. 아침에 사람을 보낼 테니 숙소에서 기다리란다. 다행스럽다. 사욍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 며칠간의 마음고생이 저절로 치유되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니, 전화기에 벨이 울린다. 사욍 집으로 가기 위해 사람이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에 카운터에서 손님이 왔으니 내려오라는 말을 전해 듣고 내려가니, 낯선 태국인이 “안녕하세요?”라는 말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했는데 뭔가 뭉실하다. 손가락이 없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가서 산재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는 한국의 3D업종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들은 야간전투를 위해 전선에 배치된 군인처럼 일을 해야 한다.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 안정장치를 제거한 채 그들은 한 공장에 2~3명씩 배치되어 치열한 생산성과의 전투를 치른다. 전투에서 실패한 전투원은 가차 없이 해고나 다른 전선으로 배치하기 위해 작업장을 떠나야 한다. 거개가 3D업종이라서 임금체불은 다반사고 언제든지 산업재해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을 하다 팔목이나 손가락이 절단된 상태로 산재상담을 위해 찾아왔다. 때론 극심한 허리디스크의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산재를 당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들 나라의 임금수준으로 책정된 형편없는 보상금뿐이다. 손가락을 잃고 받는 돈은 겨우 몇 백만 원에 불과했다. 그들은 평생을 불구로 때로는 노동력이 상실된 삶을 살아야 한다.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산재보상금을 받아 출국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암담한 현실일 뿐이다. 마치 전쟁을 치른 군인이 고향에 찾아와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그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산재를 당한 몸으로 한국에 남아서 치료를 받거나 다른 변통을 찾기 위해 애쓰지만, 노동력을 상실한 이주노동자를 받아주는 사업주는 없다.
마중을 나온 사욍의 친구 리욤(32세)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사업장에서 산재를 당했다고 한다. 그가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온 지 2개월도 채 안 된 어느 날 아침 프레스에 그의 손가락이 싹둑 날아 간 것이다. 그는 다섯 손가락이 잘린 보상으로 3,100만 원을 받았는데, 그것으로 태국에 와서 택시 2대를 소유한 사장이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태국에 와서 만난 귀환 이주노동자였다. 그는 내가 사욍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을 때 웬일인지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오른손을 치켜세우며 배웅을 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달라는 뜻 같았다. 그의 삶이 송곳이 되어 폐부를 찔렀다.
상담을 하면서 많은 이주노동자가 산재를 당하는 것을 보아왔다. 대개는 사출이나 프레스직종에서 발생하는 산재는 주요한 상담 중에 하나다. 하루에도 7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한국의 안전 불감증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리욤은 그나마 적은 보상금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고 자기 생활의 기반을 만든 터이다. 그는 내게 앞으로 600km가 넘는 길을 여행하게 될 것이라며 한숨 푹 자라고 한다. 그러면 저녁때쯤 사욍의 고향인 잠롱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데다 푹푹 찌는 날씨 때문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 길을 떠났다.  
나를 태운 차가 태국 동북부의 메마른 도로 위를 달렸다. 택시운전사인 리응조(41세)는 자신의 부인이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부인 이름이 수정이라고 했다. 한국의 동료들이 지어준 이름이라며 지금도 자신의 부인을 수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운전을 하면서 리응조는 연신 아내에게 배웠다는 한국 대중가요를 불렀다.  
차는 끝도 없이 불볕더위 위를 달린다. 실어증이 떠나가자, 정신적인 고통이 뒤를 따랐다. 간밤의 후유증으로 몸은 탈진되고 기력은 쇠약해졌다. 극도로 쇠약해진 몸뚱이를 덜컹거리는 택시 한 켠에 의지한 채 멀고 먼 길을 달렸다. 다시 이 길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이 엄습한다. 메마른 몸에서 눈물이 난다. 내 인생에서 나는 몇 번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마도 어린 시절 몇 번 울고는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강다짐한 뒤로는 운 적이 별로 없다. 기억하건대, 내가 청년이 되어 울었던 것은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때이다. 당시 나는 인천의 옛 공단에 있는 신흥목재(우아미가구)에서 일을 했다. 2개월간의 파업 동안 나는 꼭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아수라와 같은 칠흑의 밤에 구사대와 결전을 치르는 동안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유서를 쓴 적이 있다. 간단하게 쓴 메모를 작업복 주머니에 넣고 컴컴한 암흑의 시간과 맞서 먼동이 터오는 시간까지 구사대와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여성 노동자의 울음소리와 아비규환의 일대 공방이 오갔던 그날 새벽 이후 나는 눈물이 말랐다. 그때처럼 웬일인지 메마른 몸에 눈물이 솟는다.
나는 잠시 사욍이 이주를 위해 떠나왔을 길 위에 서서 내가 떠나온 길을 생각해 보았다. 태국에 오기 전에 들렀던 인도차이나반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본 황홀한 폐허가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마모되고 붕괴되어 처절한 몰골로 앙상하게 서 있는 앙코르와트의 아름다운 비극의 황홀 앞에서 나는 묵언했다. 그 폐허를 보며 왜 80년대가 떠올랐을까. 그것은 내 마음 속의 망명정부처럼 형형하다. 내 마음의 거처를 들킨 듯한 착각을 나는 앙코르와트의 처연한 폐허를 보면서 느꼈다. 폐허의 미학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인가. 아마도 우리 세대가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되어 나뒹굴고, 무너지고, 부서져 끝내는 몰골만 앙상하게 남아 다시 길 위에 서 있지 않은가. 폐허 속에 비춰진 거울이랄까, 순간적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어떤 고통으로 내몰았다. 나는 물었다. 내게 사욍은 어떤 존재인가. 내가 굳이 사욍을 만나려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를 통과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되묻고 되묻는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스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웠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불현듯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정처가 고통으로 다가왔다.
고통이 더할수록 이 길을 오갔을 이주노동자의 꿈과 좌절이 떠오른다. 거개의 아시아의 이주노동자는 가부장제도에서 집안 전체를 건사해야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들은 비록 세계경제체제 속에 값싼 노동력의 희생양이지만, 그들 이주노동자의 양 어깨에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의 장래까지 책임져야할 이중 삼중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실업률은 증가하고 일이 없다보니, 일이 있는 곳으로 노동력이 몰릴 수밖에 없듯이,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일을 찾아서 국경을 넘어 목숨을 건 이주를 단행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꿈을 향해 힘겨운 이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왜 고향을 떠나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자신의 나라에는 “일이 없다”라는 것이다.  
사욍이 살고 있는 마을까지 가는 길은 온통 흙구덩이 투성이다. 우기 때 내린 소낙비로 사방이 파헤쳐져 메워져 있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었다. 느릿한 풍경에는 우리네의 시골 풍경과 닮았다. 흰 소가 풀을 뜯어 먹고, 한가로이 구름이 흘러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웅덩이가 심하게 패여 있다. 운전을 하는 리응조도 내게 도로가 울퉁불퉁하다는 말을 이미 한터이라, 그가 이미 마을의 상태를 잘 알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사욍 역시 이 길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왔을 것이다. 드디어 방콕에서 600km를 달려온 차는 잠롱에 나를 풀어놓았다.


4. 일이 없는 마을, 귀환 이주노동자

잠롱은 2개월 째 비가 내리지 않았다. 논바닥은 갈라지고 심어 놓은 벼는 이삭을 피우기도 전에 쭉정이로 메말라가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지만 정처 없다. 먹구름 역시 그냥 지나칠 뿐 비가 오지는 않았다. 메마른 대지는 물을 간절하게 애원하는 듯하다. 집집마다 어슬렁거리는 닭 마냥 마을 사람들 역시 정처 없다. 닭과 병아리가 빈 마당을 거닐고 연못에는 부레옥잠과 연꽃이 피어 있다. 다만 바나나나무와 야자나무가 있을 뿐 우리네 사는 생활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아열대의 기후로 숨이 턱 막히고, 내륙의 기온 탓인지 아직 우기가 본격적으로 오지 않아서 인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이 푹푹 찌는 날씨다. 먼 곳에서 손님이 왔다고 대접한 선풍기조차 열기를 더할 뿐이다. 그 사이 몇몇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는 사람들이 모인다.  
안부를 묻는 내게 사욍의 첫마디는 “이곳 사람들 일없어, 나도 일없어”라는 대답이었다. 이곳 청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가고 싶어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다녀온 동네 청년 몇몇은 이곳에 그럴 듯한 집을 장만했다. 차와 농사를 지을 트랙터를 장만한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일이 없이 실업자로 지내고 있었다. 어스름이 몰려오자 한두 명씩 더 모여들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이곳 잠롱에서만 2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갔다 왔다고 한다. 인천 5공단과 남동공단 그리고 의정부, 평택, 성환, 여주, 용인 등지를 떠돌며 그들은 이주노동을 했다. 일을 하다가 자진 귀환하거나, 미등록이주노동자로 지내다 단속 과정에서 귀환한 이들은 한결같이 다시 한국으로 다시 가고 싶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 사는 문제다. 이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일이 많은 나라다.
도대체 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이들 말마따나 한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렀고, 독재정권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다. 그들에게 한국은 말레시아, 일본과 더불어 이주노동자로 가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다. 하지만 속내를 들어보면 한국은 야만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일하는 과정에서 욕설과 폭행이 난무하고 산재에 노출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장시간노동에 시달리거나, 걸핏하면 몇 개월씩 임금이 체불되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였다.
사욍의 안내로 숙소로 묵은 집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집이었다. 열대야라서만은 아닌 듯 늦도록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가끔씩 어둠에 잠긴 지평선에서 메마른 천둥이 울었다. 한밤중 비가 후드득후드득 바나나나무 잎사귀에 떨어진다. 비로소 홀로 있다는 느낌이 다시 든다. 또 밤이 깊어간다. 한참 마당을 서성거리다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을 했다는 룽(34세)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는 자신의 부인 역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근무를 했다면서 자신을 한국통이라고 소개했다. 함께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제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이 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시 있으니 사욍이 왔다. 한국에 간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했단다. 엊저녁에 먹었던 까오똠이라는 죽이 커피와 함께 나왔다. 다시 먹으니 맛이 난다. 한국의 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아침 식사를 먹은 후 사욍과 동네구경에 나섰다. 우리네 정자와 같은 곳에 몇몇 마을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니 마을의 장례식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집 마당에 모여 장례를 치루는 모습도 영락없이 우리네 시골 같다. 그리곤 초등학교로 향했다. 마을에 가장 큰 건물인데다 초등학교 1학년생들이 때마침 마을 견학을 하고 있었다. 인솔 선생님의 제안으로 아이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교실에 들어가,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학교를 나와 보건소와 사원을 둘러보고 사욍의 집으로 향했다.
사욍은 집으로 가기 전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근무한 사람들의 집을 구경시켜 주었다. 나름대로 집들이 번듯하다. 그림 같은 집들이다. 그러나 모든 귀환 이주노동자들의 집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사욍은 자기 집을 공개하기 꺼려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집이 누추해 보여주고 싶지 않았단다. 사욍은 한국에서 7년 동안 근무했지만 처음 5년간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그로 인해서 부인과는 아들 하나를 낳고 헤어져야만 했다. 그는 70여 만 원 정도의 임금으로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두 번째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와서 1년여를 근무했지만 빚만 지고 지금은 방 한 칸이 있는 집이 전부다. 집터는 있지만 집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한 삶이다. 돈을 벌기는커녕 실업자에 새장가도 못가고 나이만 든 상태라고 자신의 처지를 책망했다. 자신도 그런 상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리라.
사욍은 여건만 되면 다시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집을 짓고 결혼도 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도 건사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잡초만 무성한 텅 빈 집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마을을 둘러보고 묵고 있는 집으로 왔다. 이제 긴 이별의 순간이다. 사욍과 그리고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근무한 사람들과 작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국에서 귀환한 이주노동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고 이들과 인사를 했다. 잠시 사욍을 불러서 택시비를 주려고 하니 한국에 있는 태국 이주노동자들이 4,800바트를 이미 지불했단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차비를 사욍에게 주려고 했으나 그는 끝내 받지 않았다. 사욍과 포옹을 하면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택시에 올랐다. 차는 기약 없이 방콕을 향해 마을을 떠났다.
리응조 역시 부인인 수정과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그는 3개월에 한 번 정도 이곳 집으로 온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 수정이 1개월에 한 번씩 방콕으로 오는 이를테면 집안 자체가 이주의 삶이다. 그는 내게 간밤에 잠을 잘 잤냐고 물었다. 오히려 내가 짓궂게 되물었다. 그는 매우 좋았다고 넌지시 말한다.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아들 둘은 이미 장성했다. 큰 아들은 방콕에서 대학을 다니고 다른 한 명은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한다. 그는 한국이 돈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아내가 한국에서 5년간 번 돈으로 택시에 투자를 하고 나머지는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차는 다시 600km를 달린다. 내가 처음 떠나온 자리로 다시 되돌려 놓기라도 하듯 달리고 달린다. 나는 방콕으로 오는 내내 내가 겪은 일들이 진실과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계의 안팎에서 중심으로 열린 길은 언제나 진실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보인다. 삶의 터전을 벗어나 중심으로 나가면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질거라는 세계화에 의해 만들어진 과장된 욕망은 많은 이들을 이주노동자로 내몰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전지구적 차원으로 이동되고 있는 자본의 요구와 맞설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그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저런 생각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밀려와 온몸에 몸서리가 쳐진다. 주변부로부터 떠밀려온 이주노동자들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길 위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왔을 길을 따라 뒤를 돌아본다. 하늘은 청명하고 맑다. 그 아래 들판에는 흰 소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  


5. 귀환, 그래도 삶은 다시 시작된다

다시 돌아온 방콕의 방람프 거리에는 온종일 우기의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거리는 젊은 청춘들이 그들의 세대를 행해 돌진하듯 열정을 불사르는 듯하다. 불야성에 취한 듯 명멸하는 불빛이 나의 눈빛을 홀린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방람프와 카오산의 거리를 걷는다. 웬일일까 나는 정처가 없다. 나의 발길이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발이 흐느적거리며 비가 내리는 밤의 카오산 거리를 걸을 뿐이다. 내리는 비가 고인 웅덩이에는 카오산의 휘황한 불빛이 흐른다. 거리의 곳곳에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젊음이 아름답다 못해 비극적이다. 거리의 한쪽에는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있고 그 옆에서는 성을 파는 여인이 온몸을 드러낸 채 활보한다. 다른 한쪽에는 고양이의 울음처럼 늙은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며 몇 바트의 동전 앞에서 흐느끼듯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끝없이 대화를 하고 또 아침이면 어디론가 그들은 달려갈 것이다.
한편에서는 몇 푼의 돈과 가족을 위해 수십만 km을 넘어 온다. 생명을 걸고 국경을 넘어 목숨을 건 이주를 선택한다. 서로 다른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질주를 한다. 양극화의 지점에 내가 있다. 나는 천천히 방콕의 밤길을 걷는다. 명명하는 자본주의의 불빛이 멈출 것 같지 않는 카오산 거리에는 수많은 이국의 여행객들이 불야성을 이루며 밀려오고 밀려온다. 질주는 끝이 없어 보인다. 극단의 세계와 함께 동거하는 현실이 이처럼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웬일일까. 왜 이처럼 세계는 양극의 극단으로 내밀리고 있는가.
세계화를 요구하는 전지구적인 자본에 맞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이들에게 어쩌면 소귀에 경 읽기인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발가벗긴 채 자본에 의해 굴욕과 치욕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지금 이곳, 나와 연결된 아시아의 고통이 아니지 모르겠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겪고 있는 고통의 지점이 아닌가. 나는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는 내내 아시아의 고통이 이주의 고통으로 되살아나는 현재를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본다. 사욍이 오고간 길 위에서, 아니 잠롱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오고갔을 이 길을 되돌아오면서 묻는다. 아시아의 고통은 무엇인가. 생명을 건 이주의 삶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한 이주의 삶을 통해 무엇이 변화하는가.
인천공항에 내리자 하늘이 푸르다. 전날에 비가 내렸는지 활주로에 빗물이 고여 있다. 비로소 나는 앨리스의 동굴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짐을 찾고 출입국신고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차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이주노동자다. 분주하게 빠져나가는 출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EPS(고용허가제)로 들어오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30여 명이 유니폼을 입고 입국심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들의 눈동자에 잔뜩 긴장과 경계의 눈빛이 서려있다. 바로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하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세계는 무엇인가. 갑자기 온몸이 답답해졌다. 내가 공황증에 시달리던 방콕 카오산의 밤거리에서 느낀 바로 그 느낌이다. 무어라 형형하기 어려운 심정이 복잡하게 아열대의 빗줄기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 눈빛이 두려움의 눈빛인지, 아니면 새로운 꿈을 향한 눈빛인지, 나는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천천히 공항 출구를 빠져나왔다.  


*이글은 계간『작가들 』25호 <이세기의 이주통신 1>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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