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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재이주를 꿈꾸는 필리핀 귀환 이주노동자들

재이주를 꿈꾸는 필리핀 귀환 이주노동자들
 


이세기


얼마 전 나는 귀환 이주노동자 리서치를 위해 필리핀을 방문했다. 필리핀은 전 인구의 10%인 800여만 명이 이주노동을 하는 세계 최대의 인력송출 국가다. 필리핀 연간 총생산(GNP)의 30%가 넘는 120억 달러가 바로 이주노동을 통해 송금해온 돈이다. 해외이주노동을 희망하는 필리핀인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수도 마닐라(Manila)에 위치한 필리핀해외고용청 POEA(Philippines Overseas Employment Agency)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는 노동력 수출이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보홀(Bohol)
필리핀 중부 비사얀제도 남부의 섬에서 만난 레오(26)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인근 세부(Cebu)에서 엔지니어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몇 해째 집에서 보내고 있다. 그는 조건만 되면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200만 원이 넘는 이주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다. 레오씨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의 이란성 쌍둥이 동생들 역시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가 이들에게 돌아올 리 만무하다. 여동생은 일자리를 찾아 세부로 떠났고, 남동생 역시 선원 이주를 위해 기술학원에서 자격증을 따려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보홀의 탁빌라란(Tagbilaran)
보홀의 주도에서 만난 귀환 이주노동자 루완(39)씨의 경우 이주노동의 폐해가 심각했다. 그는 보홀을 떠나 한국에서 7년간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2006년 출입국사무소의 단속과정에서 검거되어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삶은 오로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생활이었다. 그는 월급의 절반을 매달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부치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모아 고향에서 사업할 꿈을 꿨다. 하지만 그의 귀환은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꼬박꼬박 고향에 송금한 돈은 이미 생활비로 다 나가 버렸고, 그나마 벌어온 돈 500만 원은 마닐라 투계(鬪鷄)에서 다 날려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만성적 실업난에 무기력한 실업자로 전락한 그에게 남은 것은 이혼의 상처와 가족해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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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귀환 이주노동자 리아(39)씨는 재이주를 꿈꾸고 있다. 그녀는 한국에서 가져 온 중고복사기와 300여만 원을 주고 산 봉고차를 대여해서 수입을 얻고 있다. 하지만 늙은 부모와 그의 언니 가족까지 건사하느라 그녀의 수중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그녀는 미국이나 호주로 이주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대부분의 필리핀 귀환 이주노동자들이 재이주를 꿈꾸고 있다. 코리안 드림이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욕망이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주의 삶을 강요한다. 더 넓은 집과 안락한 삶을 위해 이주를 하지만, 정작으론 가족의 해체와 이주과정에서 만들어진 상처를 안고 실업자로 전락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이주노동시장의 확대는 송출비용의 과다 지출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진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이주를 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 이는 비단 필리핀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아시아는 이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꿈꾸거나 감행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경제 불황과 만성 실업난이라는 아시아의 고통이 도사리고 있다. 세계체제 속에서 자본은 국경을 넘어 아시아의 곳곳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통한 이윤창출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과거 서구 열강의 식민지경영으로 인해 취약해진 국내 정치경제구조와 강대국 중심의 세계화가 맞물리면서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의 비극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15개 국가
(1)와 인력송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들 아시아 이주노동자 대다수는 제조업, 건설업, 농축산업, 서비스업, 어업 등 3D업종에서 40만 명 정도가 일하고 있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포함하면 약 63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장밋빛 꿈을 안고 한국으로 온 아시아의 이주노동자들 대다수는 송출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미등록이주노동자로 전락하여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사망하고 있다.(2) 미등록이주노동자에 대한 임금체불은 다반사이고, 최저임금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저임금 노예노동의 강요와 사업장 변경의 제한으로 인권과 노동권의 심각한 침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주노동 문제에 있어 한국사회는 20년 전으로 후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아시아의 이주노동자에게 매력적인 나라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은 지난 30년간 압축 성장과정에서 누적된 부실을 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낳았으며 아시아의 값싼 노동력을 도입하는 데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 거개의 3D업종 일자리가 아시아의 이주노동자로 대체되고 있으며 자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고용창출은 한국이 이주노동자에게 기회의 땅으로 떠오르는 이유다. 현재 외국인 수가 130만 명을 넘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한국은 결혼이주를 포함하여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아시아의 많은 이주민들로 넘쳐나고 있다. 개발독재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 독일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지로 이주노동자를 파견하던 송출국가에서 이제는 도입국가로 위치를 바꾼 한국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일본과 더불어 이주노동자의 희생과 고통을 밑거름으로 확대재생산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의 동북아 패권주의와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만을 비판할 게 아니라 우리 역시 우리를 향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이주노동문제를 통해 되살아오고 있는 아시아의 고통은 아시아의 새로운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손을 내밀어 고통의 지점을 함께 통과해야하지 않을까? 질문해 보자. 과연 우리에게 아시아는 무엇인가.


1) 2008년 6월 현재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베트남, 몽골, 우즈베키스탄, 캄보디아, 파키스탄, 중국, 방글라데시, 키르키즈, 네팔, 미얀마, 동티모르 등 15개국.

2) 2006년 기준으로 산업재해는 하루 평균 9명, 사망자는 연간 90명.


李世起, 1963년 인천생. 시인, 최근 글로 「이세기의 이주통신」(연재), 시집으로 『먹염바다』 등. halmibburi@hanmail.net
* 이 글은 플렛폼 11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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