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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애리카의 꿈


 

깨어진 꿈


애리카(13살)의 집은 반지하다. 미로 같은 다세대주택이다. 말이 반지하이지 햇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다. 여기서 아버지인 후세인 씨(41세, 방글라데시)와 어머니 오성혜(39세) 씨 그리고 동생 환희(5세)가 함께 살고 있다. 요즘 애리카는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동생 환희와 노는 시간도 많아졌지만, 무엇보다도 인터넷을 통해 친구들과 쪽지대화를 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친구끼리 쪽지를 주고받는 에리카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비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근에 있는 핸드폰 조립공장에서 함께 근무한다. 아버지가 전에 다니던 공장이 폐업한 후 직장을 잡지 못하다가 겨우 집 근처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어머니도 도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에서 부업으로 일하다가 아예 눌러 앉았다.  아버지는 주로 야간근무라서 오후 8시에 집을 나가 아침 8시쯤 퇴근하고, 어머니는 반대로 아침 8시에 출근을 해서 저녁 8시쯤 퇴근한다. 하지만 생활은 항상 궁핍하다. 한 달에 15일 정도의 일감 밖에 없어서 정상적인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2개월간 임금체불이 되어서 생활형편이 어려운 실정이다.

오성혜 씨 부부가 다니는 핸드폰 조립공장은 주로 영세 사업자들이 하는 터라 일이 있을 때는 잔업이 많지만, 일이 없을 때에는 며칠이고 집에서 놀아야 한다. 그나마 8,9월 달에는 성수기라서 일 물량이 많은 것이 다행스럽다고 한다. 일이 많을 때는 사생활을 접고라도 일을 해줘야 밥줄이라도 놓지 않고 유진된단다. 아마도 추석 때까지는 바짝 일 물량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럴 때는 고맙다.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이주민이 마땅한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국제결혼한 부부의 경우 결혼과정에서부터  험난한 파고를 겪는 터라 생활이 녹녹치 않다. 

오성혜 씨는 부평초와 같은 삶을 살았다. 언니가 있는 일본에서 이주노동을 한 것이 이주의 시작이었다. 그곳에서 남편 후세인 씨를 만났다. 17년 전 일이다. 남편 후세인 씨는 일본에서 8년 동안 어학공부와 전기기술을 배우며 이주노동을 했다. 일터에서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주변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91년에 동경에서 결혼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애리카가 태어났다. 둘이서 착실하게 모은 돈으로 96년에 남편 나라인 방글라데시에서 의류사업을 시작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사업경험이 없이 시작했던 남편의 일은 부도가 나서 파산을 하고 2002년 다시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처음에 오성혜 씨는 일본에서 배운 일본어와 남편 기술로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일본어 가이드 일자리를 구했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이력서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공장 일을 찾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남편 역시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전기관련 기술자였지만 한국에 만연해 있는 아시아계 이주민에 대한 비선호도로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기술과 외국어 능력을 원하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까지 실업자로 있을 수 없어 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갔다.

이주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 부부는 의욕으로 넘쳐 났다. 한국생활에 정착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또한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다문화적 특성도 장점이 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부부에게 찾아온 것은 냉소와 편견이었다. 다문화가정 1세대라고 해야 할 이들 부부에게 생활은 곧 싸움이었다. 일자리를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변의 따가운 편견과의 싸움이 이들 부부를 기다렸다.

“다문화가정 너무 힘이 들어요, 우리를 그냥 사람으로 대했으면 좋겠어요.”

산전수전 다 겪은 오성혜 씨의 말처럼, 다문화가정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이 변하지 않고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너무 많이 산적해 있다. “처음엔 의기양양했죠, 무슨 일이라도 닥치면 할 수 있으리라 봤어요.” 이 말 속에는 그간 일상생활에서 숱하게 부딪친 문제들이 있어왔고 그 과정에서 이들 부부의 이주의 꿈이 깨졌음이 은연중에 드러났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아이들이다. 앞으로 아이들이 자라면서 받을 상처가 우려 된다고 했다. 혹여 쇼핑을 가거나 가족끼리 산책이라도 나가게 되면 “너희들 어디 나라에서 왔냐?”는 질문을 하거나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시선을 주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말 못하는 상처를 받는다.

아이들이 상처를 입으며 크는 것이 부모로서 가장 힘들다는 오성혜 씨는 국제결혼을 한 것에 대해서 회의할 때도 많다. 일이 힘들고 고단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 전가되는 차별적 시선만큼은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 끝에 이들 부부는 부모로서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말 못할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애리카의 경우 학교에서 오면 부모와 대화를 꺼려해 학년이 올라가고 나이가 들수록 힘에 부쳤다고 했다. 그나마 교우관계가 좋은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애리카 역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내적으로 성숙해졌다고 한다. 오성혜 씨는 그것이 애리카가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꿈도 자랄까?


이점에 대해서 후세인 씨도 동의했다. 그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방글라데시로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곳 저곳을 유랑하며 떠도는 삶이 버겁다.

아내인 오성혜 씨도 한국 보다는 방글라데시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우선은 아이들이 수많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나 태국, 싱가포르 등지에서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선을 주목받거나 그로 인하여 상처와 혼란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다른 나라로 이주를 하고 싶다고 오성혜 씨는 말했다. 비단 이는 오성혜 씨 집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다수 국제결혼가정 부부를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한국으로 온 이후 하루하루가 전쟁이었어요.”

아이들이 살아 갈 사회를 낙관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순혈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이 받게 될 상처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물려받게 될 가난과 소외의 대물림이 악순환 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한숨 밖에 안 나와요, 오히려 이젠 내쉴 한숨도 없답니다.” 오성혜 씨는 이젠 자신도 너무도 많은 상처의 언어를 가졌다고 했다.

그녀가 받는 상처는 기억 속에 목록화 되어 있었다. “동사무소나, 무슨 기관에서 리서치를 한다고 연락이 올 때면 이젠 짜증밖에 안 나와요. 처음에도 제도와 정책의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발언도 해보았지만, 그게 다 허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알고 보면 생색내기에 불과하고, 마치 이주민이 불쌍하다는 동정적인 시선이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제발, 뭔가를 주입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외국인이 한복을 입으면 그것이 동화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문화가정 지원책에 대해서 쓴소리를 한다. 국제 결혼한 자신들을 한국식 잣대로 일방적인 교육대상으로 삼는다는 것과 동화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 점에 동의했다. 온정주의나 동화주의는 또 다른 구별짓기에 다름 아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은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짧은 시간에 해결하려고 하거나, 주입시키면 그만큼 다문화는 숨을 죽이고 뒤로 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의 동화과정이란 어느 일방의 통행이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국제결혼을 통해 결혼이민자 가정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결혼이주는 한국사회에서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의 경우 값싼 노동력의 제공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냉소와 동정 어린 이중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정치경제학적 의미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들 지위가 사회적으로 보장받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한국사회가 이주민을 대하는 태도가 순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주민은 이중삼중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험난한 파고를 넘어 국적과 국적을 떠나 결혼한 국제결혼 이주민의 경우 생활에서 자녀양육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산재되어있다. 이중언어와 이중문화 그리고 그로부터 새롭게 생성된 다중문화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 보다는 저해하는 요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주민에 대한 사회적 환경과 인식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

더욱이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경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지도 모른다. 문제는 한국사회가 순혈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들이 겪을 정체성의 혼란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장벽이다. 따라서 혈통에 의한 국적 부여, 이중국적 불인정, 단기순환과 정주화 방지, 가족결합 금지 등 관련 정책이 변화하지 않고서는 한국식 다문화주의는 오히려 혈통주의와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될 것이다.

최근 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결혼이주민을 위한 ‘사회통합교육이수제’ 역시 일방의 주입과 강요만 있지,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실상 이주민 상담을 하다보면 거개가 이주여성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들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더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쩌면 국제결혼을 하려는 이주여성보다도 더 교육이 필요한 것은 한국인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히려 한국인에게 다문화이해교육이 필요하다. 함께 백년해로를 약속하고 부부로 맺어졌다면 그만큼 상대방의 문화를 알고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위를 선점하고 나서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강요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통합이 아니라 차별의 또 다른 모습이다. 상호 문화를 존중하는 다문화적 관점이 무엇보다도 필요로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애리카의 집을 방문했다. 아버지인 후세인 씨는 밤일을 끝내고 들어와 어두운 방안에서 칼잠을 자고 있었고, 애리카와 환희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동생을 돌봐주는 애리카가 대견스럽다. 요즘 뭐하고 있냐는 질문에 애리카는 얼마 전 노인양로원에 가서 자원봉사를 했단다. 너무 좋았다고 했다.

애리카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애리카의 꿈이 소박하다. “그런 꿈 말고 다른 꿈은 없어?” 재차 물으니, 애리카는 한참을 뜸들이다가 커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꿈도 자랄까?” 내가 다시 물었다. 여름산의 싱그러운 빛처럼 애리카가 환히 웃는다.


 


* 현재 한국에는 결혼인구의 13.6(2005년 기준)%가 국제결혼이다.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가 현재 2만 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을 ‘코시안’ 혹은 ‘다문화가정자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이들을 코시안 내지 다문화가정자녀로 불리는 것조차 인권침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순혈주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가 이들에게 ‘이름짓기’를 통해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정착민에 대한 상대적인 역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 당사자 역시 자신들을 특별한 인간으로 ‘구별짓기’를 거부하고 있어 ‘이름짓기’가 낳은 또 다른 인권침해 소지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쓴이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한국아시아이주민센터>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64호에 연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