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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귀환 이주노동자 리아 이야기

1. 리아가 사는 섬

우기가 막 시작된 필리핀 세부(Cebu) 막탄공항에 내리자 열대야의 후덥지근한 날씨가 기다렸다. 자정을 넘은 시간, 차를 타고 보홀(Bohol)행 배가 떠나는 항구까지 이동했다. 필리핀 사람들은 밤잠이 없는지 새벽으로 가는 시간인데도 어둑한 거리에 사람들이 서성인다. 삼삼오오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새벽 2시. 항구의 여객선 터미널에는 정문을 지키는 경비와 몇몇의 필리핀 사람들이 대합실 의자에 잠들어 있다. 밤샘을 할 요량으로 매표소 앞 맨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드러누웠다. 하지만 초행길인 탓도 있지만 사람들의 오가는 발길로 잠이 오지 않는다. 간간이 항구에는 배가 들어와 여행객을 풀어 놓는다. 여느 객선 터미널과 다를 바 없다. 소란이 멈추고 여행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또 다시 정적이다. 부둣가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애처로이 들렸다. 잠시 주변을 돌아본다. 보홀로 떠나기 위해 새벽부터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든다. 한산했던 항구는 아침이 밝아 올수록 사람들로 붐빈다. 마닐라에서 배를 타고 온 보홀이 고향인 사람이며, 보홀로 여행을 떠나는 외국인, 잠시 세부에서 일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뒤엉켜 표를 구매하기 위해 서 있다. 새벽 5시경 매표구가 열리자 짐을 검색하고 승선했다. 승선할 때 난간 밑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다섯 살 난 여자 아이와 등에 아이를 업은 추레한 여인이 뗏목을 타고 손을 내밀며 1페소를 외친다. 배는 이들을 뒤로하고 물살을 가르며 보홀로 향했다.

우기를 맞은 필리핀 보홀에 7월의 밤비가 망고 잎사귀를 때리며 내린다. 밤하늘에 천둥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거리는 온통 지프니(Jeepneey)와 트라이시클(Tricycle)의 요란한 소리로 가득하다. 굶주린 용이 지상에서 승천하듯 포효하는 울음소리가 발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은 느릿하다. 서두르는 법이 없는 필리핀 사람들을 닮은 어두운 밤이 사람들과 함께 뉘엿뉘엿 빗소리에 파묻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낮에는 야자 잎사귀조차 축 늘어질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려 활동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점심 무렵에 거개는 잠시 일을 멈추고 사무실이나 야자 그늘에 누워 오수를 즐긴다. 트라이시클 운전수 역시 잠시 일을 쉬고 그늘에 누워 잠을 잔다. 낮이고 밤이고 연신 울어대는 닭울음소리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골목에서 끝없이 흘러나온다. 집집마다 꽃기린으로 장식한 담장에는 각양각색의 온갖 열대의 꽃들이 피어있고, 야자수와 바나나나무는 실바람에도 흐느적거리며 무더운 한낮을 보낸다.

보홀은 얼핏 낭만이 있는 섬이다. 하늘빛을 닮은 바다와 바다를 닮은 하늘빛이 경계가 없어 사방이 바다다. 금세라도 쪽빛 바다에 맨몸으로 뛰어 들어가는 아이들이 있다. 어디를 가든 노래 소리가 들리고 춤에는 익살이 묻어있다. 곳곳에 시름없이 널브러져 있는 개들과 어미닭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어린 병아리들이 골목마다 눈에 띈다. 사방에 야자와 바나나나무가 자라고 열대 우림의 숲으로 둘러싸인 곳엔 벼가 심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좀 더 숲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투계를 위해 닭을 키우는 곳과 농구골대 그리고 대나무로 엮은 한 칸짜리 집, 칠도 칠하지 못한 보도블록으로 지은 집 등이 숲과 부조화스럽게 자연을 이루고 있다. 때론 정적만이 흐른다. 시내의 골목에는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집들이 어둠처럼 잠겨있다.

한 낮의 해가 바다로 떨어지고 밤이 오면 청년들은 길가나 골목으로 삼삼오오 쏟아져 나온다. 새벽이 되도록 트럼프를 하거나 길을 배회하는 눈빛에는 정처가 없다. 내일이 없는 오늘을 보내는 청년의 모습이다. 다만 시내 중심에는 트라이시클의 행렬이 끝이 없다. 매캐한 매연을 내뿜으며 발이 되어주는 트라이시클 운전이 이곳 보홀에서 직업을 창출하는 유일한 일처럼 보인다.

 


보홀 탁빌라란

시내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약국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과 멀티캡(Multy Cap)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뒤엉켜 왁자지껄하다. 저녁 무렵이면 학교에서 막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거리를 온통 교복으로 물들인다. 습기를 머금은 오래된 성당과 타는 듯한 황금빛 태양이 내리 쬐는 청아한 하늘 아래 탁빌라란(Tagbilaran)의 하루가 모기를 쫓기 위해 피워놓은 화톳불 연기와 함께 저물어 온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설교소리와 닭 우는소리가 자연과 문명을 뒤섞어 놓은 듯 하루가 시작된다.

어찌 보면 이주는 자연에서 나와 문명의 숲으로 걸어 나오는 길처럼 보인다. 그 길은 숲 내음이 가득했으나 종내는 자연을 상실한 고독한 소외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내가 필리핀 보홀에서 만난 귀환 이주노동자 리아(39세)씨가 바로 이와 같았다. 그녀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여 이주노동을 선택하기까지 고향 보홀은 그녀에게 하나의 운명이고 탈출구였다. 누군가 그랬다. 자연이 권태롭다고. 필리핀의 거개 이주노동자들의 선택처럼 그녀 역시 단조로운 삶을 박차고 이주를 통해 탈출을 꿈꿨다.

 

 

2. 귀환 전후


리아가 고향인 보홀에 돌아온 것은 2006년 12월 이었다.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일을 하다가 출입국 직원의 단속에 걸려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7년간 이주노동자 생활을 끝내고 고향에 막 도착한 그녀의 손에는 한국에서 가져 온 옷가지가 담겨져 있는 짐과 300만 원 정도의 돈이 쥐여져 있었다.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귀환 이주노동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귀환 이주노동자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귀환 이후를 대비하여 마련한 대안투자와 지역 사회와의 재통합을 위한 프로젝트다. 마침 프로젝트 추진 투자 지역이 보홀이라서 그곳이 고향인 리아 씨는 이주노동을 통해 번 돈의 일부분을 투자했다. 그녀가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것은 귀환 이후 가족과의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다.

실상 이주노동은 환상과 같은 것이라서 어느 정도의 돈을 모으면 그것으로 삶이 연장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앞날이 막막할 정도로 절망이 찾아온다. 자발적 이건 비자발적이건 완전한 귀환은 '많이 벌고, 많이 아껴서 모국의 가족들에게 더 밝은 미래를 제공한다'는 이주노동자의 목적이 달성된 경우다. 하지만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모국으로 귀환 이후 가족과의 결합은 물론 지역 사회와의 통합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낳는다. 완전한 귀환의 경우 가족과의 결합은 물론 모국에서 미래까지 설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경제적 궁핍과 가족해체는 물론이고, 그에 따른 후유증으로 삶 자체가 파탄 나거나 다시 이주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가 귀환 이주노동자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홀에 있는 홀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언니의 가족까지 부양을 책임져야할 의무가 따라다녔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언니의 생계비와 여동생, 그리고 조카까지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그녀는 가족에 속박당한 몸이 되었다. 그녀의 영혼조차 그녀만을 위한 한뼘의 공간도 없었다. 그녀는 가족생계를 위해 2000년에 200만원의 돈을 빌려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왔다. 그리고 7년을 이주노동자로 일했다. 시화공단에서 시작한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은 산업연수생으로 시작했다. 산업연수생은 노동자로서의 신분이 보장되지 않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에 사업장 변경조차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퇴직금도 받지 못한다. 사업장에서 욕설과 폭행이 난무해도 불이익처분을 받을 까봐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는 일종에 현대판 노예노동이었다. 이 같이 열악하고 혹독한 노동조건은 그녀로 하여금 사업장을 이탈하게 했다. 그 후 부산, 수원, 인천 등지를 떠돌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항상 쫓기는 신산고초한 삶이었다. 그녀는 한국의 공장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을 비롯하여 동료들이 겪은 체험들을 내게 들려주었다. 당시에 연수생 신분으로 온 대다수 이주노동자는 몸이 아파도 일을 해야 했고, 회사를 그만두면 갈 곳이 없었다고 한다. 중간관리업체인 에이전시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직장이 구해질 때까지 무작정 대기상태에 있어야 했다.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동료도 있고, 회사를 그만두면 기숙사에서 나와야 했으므로 갈 곳이 없는 동료들이 많았다. 그 뿐 아니라, 월급을 제 때 안주는 일은 비일비재 했다. 일이 없을 경우에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을 적용해 한 달 동안 20여만 원도 못되는 돈을 받은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이유로 동료들은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지 못하자, 회사에서 도망쳐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전락했고, 그들 뒤에는 항상 ‘불법’이라는 딱지가 따라 다녔다. 필리핀 에이전시의 횡포도 심했다. 그들은 돈만 챙기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을 이주노동자에게 전가시켰다. 그로 인해서 사업장에서 문제가 생겨도 해결을 하지 못하고 온갖 피해를 입다가 결국에는 인권센터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해결된 사례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동료들은 울산, 안산, 일산 등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는 이곳저곳의 공장을 전전하다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동료 8명과 함께 출입국의 단속에 걸려 마닐라를 통해 보홀로 돌아왔다.

현재 그녀는 귀환 이주노동자 프로젝트로 세워진 갈릴래아 교육연수원에서 일하고 있다. 아직은 개발단계라서 연수원은 이곳저곳이 공사 중이었고, 내부 역시 공사가 진행 중 이었다. 투자한 비용이 귀환 이주노동자에게 이익으로 배분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갖추어야 할 부대시설이 부족한 터에 재정 역시 모자라다. 앞으로도 2년간은 지속적으로 투자와 개발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그녀는 내게 최근 대학생들이 합숙장소로 이용하곤 한다고 했다. 또한 가끔씩 한국에서 손님이 온다고 했다.

때마침 찾아간 연수원은 텅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후 그녀는 한국에서 다녀간 활동가들이 심어놓은 어린 나무들을 보여주었다. 타는 듯한 더위에 나무들 역시 풀이 죽어 있다. 간절함이 땅에서 희망으로 자라고 있다. 아직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있지만, 갈릴래아는 필리핀 귀환 이주노동자에게 희망의 터전임이 분명하다.

이주노동을 한 한국에 대해서 물으니 그녀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뚜렷하게 기억해 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한국에서 배웠다는 김치와 미역국을 직접 만들어 내게 점심을 대접했다. 귀환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국의 음식문화까지 몸에 배어 있다. 그녀는 한국이 고마운 나라라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자신이 미등록으로 있을 때 사람의 정을 많이 느꼈기 때문이란다. 그건 보홀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렇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사람의 정 속에 살아왔다. 그 말은 정에 굶주려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를 몇 차례 만났을 때, 여동생과의 불화가 있음을 내비쳤다. 그녀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여동생을 가르쳤지만, 지금은 교사가 된 여동생이 어머니를 부양하는데 소홀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힘든 이주노동 생활에도 불구하고 동생에게 학비를 보내 준 것이 그나마 자신을 지켜준 보람이었는데, 고향에 돌아오니 여동생은 졸업을 하고 일을 찾아 나갔다. 여전히 자신이 어머니를 부양하고 있어 마음의 짐이 여전하단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책이 한국에서 가져온 얼마간의 돈으로 차를 사서 임대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한 달에 약 4,000페소 정도. 그리고 연수원에 와서 일을 보고 있지만 이익금이 나오지 않는 터라 과외로 복사기를 한 대 사서 주말에 여동생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들어오는 돈이 500페소 정도. 이곳에서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6,000페소에다 전기료 1,500페소의 돈이 든다고 했을 때 빠듯한 생활이다. 생활 얘기가 나오자 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은 것이 생활이 아닌가. 이주의 삶이 그러했고, 지금 역시 그녀는 끝없는 생활과의 전쟁에 지쳐 보였다. 설핏 피로에 지친 그녀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3. 이주, 뫼비우스의 끈


이주는 끝이 없는 다람쥐 쳇바퀴 같다. 뫼비우스의 끈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주노동이다. 리아 씨의 경우처럼 다시 돌아온 보홀의 현실이 또 다른 탈출을 꿈꾸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유일한 생존이자, 삶의 탈출구가 아닌가. 나는 그녀와 탁빌라란과 연수원이 있는 팡라오(Panglao)를 오가며 몇 차례 걸쳐 인터뷰를 하는 내내 절망의 끝자리에 놓여 있는 삶이 있다면 이주노동으로 떠도는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가 들려준 귀환 이주노동자 루완의 경우가 그러했다.

마닐라로 간 루완은 처음에는 고향인 보홀의 다오(Dao)에서 생활했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생활하면서 실업자로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다가 지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마닐라로 떠났다. 마닐라에 가서 그는 한국에서 번 돈을 투계로 다 날렸다. 투계에 빠진 대가는 이혼과 가족해체로 이어졌다. 한쪽 다리에 칼을 차고 날아올라 상대방의 목을 향해서 끝없이 부리를 쪼는 투계로 한몫 잡으려다 오히려 삶의 전부를 잃어버렸다. 싸움에 지쳐 전의를 상실하고 추락한 닭처럼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마치 자본의 끝없는 성질을 닮듯 날아올라 솟구쳤다가 상대의 집요한 공격에 주저앉은 꼴이 되었다. 투계 싸움에 끝이 있듯,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마닐라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인생에 과연 끝이 있을까. 나는 내내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그것은 또한 내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다. 고통이 때론 현실을 포기하게도 하지만 생명이 있는 한 삶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들려준 한국에서의 이주생활은 울음과 비애뿐이다. 그녀가 번 돈은 가족을 건사하는 것으로 소비되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결혼 연령기를 훌쩍 넘긴 자신뿐이다. 이주노동과 함께 그녀도 늙어 갔다. 시집을 가야할 나이에 그녀는 이주노동을 한 것이다. 결국 이주노동을 통해 얻은 것은 가족과의 생이별과 여전히 불안한 뫼비우스 끈과 같은 미래이다.

그녀는 최근 3년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2년을 더 연장할 수 있는 새로운 고용허가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내가 5년이라는 시간이 젊은이들에게 결혼연령기이고 이후 정상적인 삶을 가로 막는 것이 아니겠냐고 물었다. 그녀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결혼보다도 생활이 우선이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나는 리아 씨를 인터뷰하는 내내 한국의 이주노동문제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잉태할 것으로 생각했다. 리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을 이루어야 할 나이에 객지에서 일에 매여 있을 가능성이 무엇보다도 높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실적인 대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족이주와 함께 정주권을 주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 문제를 제기하니 리아 역시 동의한다. 실제로 한국 사회 역시 숙련된 기술자와 안정된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되어야 한다.

기실 한국의 이주정책은 가족을 해체시키고 결혼연령기의 젊은이들에게 노동력을 짜내는 반인권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한국은 가족이주를 인정하지 않지만 이주가 이제 세계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했을 때 가족동반을 허용하는 전향적인 이주정책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어느 누가 고향을 떠나고 싶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의 고향과 부모형제를 뒤로하고 외따로 떨어져 고된 이주노동을 하고 싶겠는가. 이주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이주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책이겠지만 그 역시 해결책은 못된다. 세계의 곳곳에서 이주노동을 요구하는 이상 이주는 필연이다. 그것은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욕망과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서 시작된다.

지구의 한편에서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넘쳐나는 욕망의 배출구를 향유한다. 세계가 불평등한 체제로 고통을 당할 때 피해를 입는 것은 정치권력이 아니라 생존하는 삶이다. 그것은 때론 절망을 낳지만 희망의 블랙홀이기도 하다. 그 블랙홀은 흔들리고 찢겨지고 절망하고 분열되는 인간의 삶의 총체성을 지배하고 그것의 탈출구로 이주는 끝없는 욕망을 재생산해 낸다.

물론 거개의 이주노동자는 환경조건과 성장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그나마 선택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노동에는 선택이 없다. 노동에는 사람의 환경조건이나 성장배경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건강한 노동력이 필요할 뿐이다. 오늘도 세계의 곳곳에서는 이주노동을 꿈꾼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을 위해, 치욕스러운 오늘을 벗어나기 위해 탈출을 꿈꾼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 모두는 이주민이다.

리아에게 한국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면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고 했다. 당시에 공장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는데, 그날 역시 야근을 했다. 필리핀 동료 3명과 함께 일을 하다가 소주를 사서 울면서 마셔댔다. 그것이 술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라고 했다. 그녀도 내게 살면서 고통이 있었냐고 묻는다. 나도 지난 몇 년간의 이주노동자와 함께 했던 삶의 일부분을 들려줬다. 손가락과 팔이 잘려지고 월급은 만성적으로 체불이 되고 폭력과 폭언이 난무하는 사업장에서 이주노동을 한다는 것이 비단 이주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야만의 경계에 있다고 했다. 그녀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었다. 결혼을 하고 싶단다. 아이도 1명 정도 낳고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밝혔다. 또 다른 꿈이 있냐는 질문에 그녀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함께 밤 물때 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걸었다. 그녀를 연수원에 바래다주고 다시 탁빌라란으로 오는 칠흑의 어둠 속에서 스치듯 명멸하는 불빛과 함께 질주하는 한 삶이 차창 밖에서 어린다. 잠시 보홀에서 보았던 광경들이 차창 밖으로 혼란스럽게 배어온다.

거리 곳곳마다 필리핀적인 것보다는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산들이 더 눈에 띄었다. 스페인의 오랜 식민지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미군정을 거친 오늘의 필리핀은 다문화적인 요소가 곳곳에 배어있다. 이곳 보홀에서만도 비샤아어와 타갈로그어, 영어를 혼잡스럽게 혼용하여 쓰고 있었다. 성당에서조차 비사야어와 타갈로그어와 영어로 찬송을 부르는 오늘의 현실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권투와 투계에 열광하는 나라, 백여 가지의 토속어와 함께 타갈로그어, 영어를 동시에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있는 나라, 가장 많은 이주민을 배출하는 나라 그러면서도 문화적 소수집단인 원주민의 삶은 고유한 특색을 지닌 나라가 필리핀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러한 필리핀의 현실을 오늘날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겪고 있는 탈식민주의의 과제로 이해한다. 삶의 도처에 생활 깊숙이 내재해 있는 식민지의 잔재는 또 다시 넘어야 할 거대한 파고처럼 보인다.

리아가 사는 이곳 보홀과 인천 인근 바다에 떠있는 섬이 차이가 없듯이, 동시대에 일제 강점기를 겪은 흔적이 배어있는 아시아의 경험이 과연 이 시대에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러기에는 현실이 너무 무거웠다.

인터뷰를 끝내고 탁빌라란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둠에 잠겼다. 저녁 9시 어름의 팡라오는 칠흑이다. 속도 계기판이 고장난 택시는 알 수 없는 속도로 어둠 속을 달린다. 길 양옆으로 코코넷나무가 스치듯 지나간다. 가끔 어둠 속 헤드라이트 불빛 속으로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필리핀 노동자의 모습이 지나친다. 버겁다. 그러다 개가 길을 가로지른다. 차가 어둠 속을 달릴수록 하나의 세계를 뒤로하고 또 다른 세계를 행해 질주한다. 블랙홀 같다.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수록 알 수 없는 의문이 미궁 같다. 차창 밖의 한 사내가 침묵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사내에게 질문을 한다.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차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 시대가 어둠 속에서 달리고 또 달려온다.

 

 

4. ‘니라도라’와 같은 운명


귀환 이주노동자에 대한 리서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부와 마닐라를 들렀다. 보홀에 비해 세부와 마닐라는 문명의 숲 그 자체였다. 화려한 문명의 숲에서는 온갖 욕망이 꿈틀거리고 발산한다. 거리에는 온갖 다국적 기업의 간판이 즐비하고 빌딩 숲 사이에 거대한 쇼핑몰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소비의 천국을 연상케 하는 아시아 최대의 쇼핑몰이라는 SM Mall of Asia가 있는 나라. 7,000여개의 섬을 가진 나라. 가톨릭 국가지만 무슬림 세력도 무시 못 하는 나라. 일국적 민족국가의 경계가 무너진 다문화주의 국가. 100여개 이상의 언어와 스페인, 일본, 미국의 식민지를 경험한 나라인 필리핀은 오늘날 가장 많은 이주민을 해외로 보내는 나라다. 국민의 30%가 이주민으로 세계의 구석구석으로 이주를 하고, 국민 총생산량의 13%가 이주노동으로 번 돈으로 살고 있는 나라가 오늘날의 필리핀이다. 그래서 인지 필리핀에서 이주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방편이 되고 있다. 그로 인하여 끝없는 이주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주노동을 마치고 귀환 했으나 본국에 일자리가 없거나, 귀환 이후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다시 제3국으로 재이주를 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많은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은 모국으로의 귀환을 포기한다. 경기도 시흥에서 만난 라리 씨 역시 10년 넘게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전기 콘센트를 만드는 공장에서 그는 공장장 대우를 받고 있다. 그가 일손을 놓으면 공장이 가동을 중지해야 할 정도로 그의 노동은 숙련공의 수준을 넘어 공장의 생산에서 품질관리, 납품까지 도맡아 처리하고 있다. 물론 그에게도 필리핀 팡가시난(Pangasinan)에 아내와 2명의 자녀가 있다. 그는 매달 60만 원 가량을 송금한다고 한다. 그것으로 그의 의무는 다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 역시 그가 귀환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시화공단 인근에서 일하고 있는 로니 씨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13년 여 동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있으면서 귀환을 스스로 포기한 경우다. 귀환해서 적응할 자신이 없다고 하지만, 더 큰 이유는 5명의 딸린 가족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남기로 한 것이다. 지금하고 있는 일 또한 숙련된터라 공장에서도 그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긴 상태이다. 직원이 3명뿐인 공장에서 그는 두 명분의 몫을 감당한다고 했다. 하루에 12시간을 일해 110만 원 정도를 벌지만, 그나마 이 돈이라도 벌지 못하면 필리핀에 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이는 비단 라리와 로니 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지 못해도 하소연 할 길이 없다. 이들은 잔업에다가, 주말에는 인근에 있는 다른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면 번 돈을 가족에게 송금한다. 대다수는 시흥, 안산, 안성, 용인, 원주, 파주 등 안 거쳐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부평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이들은 마치 마닐라 중심을 관류하는 파시그 강(Pasig River)에 떠다니는 ‘니라도라’(Niladora)와 같은 운명이다. 연꽃과의 꽃인 니라도라는 마닐라의 중심부를 거쳐 마닐라 베이(Manila Bay)로 흘러간다. 도심의 한 가운데와 빈민촌을 사이로 유유히 떠내려가는 니라도라를 보노라면 불현듯 정처 없다. 하늘의 구름을 닮듯 마땅히 거처할 곳도 잠시 머무를 이유도 없이 남태평양이 무한히 열려있는 마닐라 베이를 향해 떠내려가는 모습이 마치 세계 각처를 떠도는 필리핀 이주민의 삶처럼 정처없다. 아니 어쩌면 떠밀려간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마닐라 베이까지 흘러갔다가 태평양과 만나 숨 쉬듯 밀려갔다 밀려오는 파도너머에 몸을 맡겨 유빙처럼 떠돌다 끝내는 사라질 운명이 바로 니라도라 삶이다. 이주의 삶이 니라도라와 다르지 않다.

 

파시그 강의 니라도라

한국으로 오기 전에 리아와 마지막으로 전화 통화를 했다. 그녀가 끝내 밝히지 않는 꿈이 듣고 싶었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미국에 이주노동자로 다시 나가고 싶다고 했다. 가족의 생계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내내 숨이 턱 막혔다. 끝이 없이 순환하는 이주노동. 찢겨진 삶과 끝이 보이지 않는 유랑. 가족과의 생이별. 나는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막막했다. 단순히 아시아의 비극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역사에 대한 소통이 필요하고, 오늘날 아시아의 고통이라고 말하기엔 삶은 너무나 절박한 것이 아닌가. 그녀에게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뼈와 영혼을 묻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그녀의 운명도 아니고 그녀가 선택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가 진행되고 그로 인하여 초국가주의로 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고향을 지키고 고향에서 삶을 가꾸고 산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제조업은 없고 소비만 있는 삶,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환율, 날로 악화되고 있는 경제 상황, 늘어나는 실업률이 많은 필리핀 사람들을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떠밀려왔다 떠밀려가는 니라도라의 운명, 이주노동에 몸살을 않고 있는 아시아의 오늘이 부유하는 니라도라와 다를 바 없고, 또 다른 수많은 리아가 이주를 하고 다시 재이주를 꿈꾸는 악순환의 순환. 그리고 이산. 인간으로서 차마 견디기 어려운 모멸과 고통을 당하고, 살기 위해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 아닌가. 그녀의 말마따나 우리 모두는 이주로 연결된 관계들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일이 끝나면 하루 하루 치욕을 견디게 해달라고 기도했답니다. 어떤 날은 밤새 울었어요. 그 때 고향에서 들었던 풀벌레 소리가 공장 마당 한켠에도 울더군요. 그 때 느꼈어요. 내가 사는 이곳이나 내가 잠시 살았던 한국이 모두 연결된 것 같았어요. 서로 다르지 않아요. 우리 모두는 이주민이에요, 어디에 있건 간에.”

 

이세기 시인. 인천 출생. 199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멱염바다』가 있음. halmibburi@hanmail.net 
* 이 글은 계간 <작가들>가을호(2008)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