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주 꿈을 만나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불온한 상상력, 이주노동자

이 세 기 

 

추방의 공포와 불안


이슬람(30세)씨는 한국에서 열한 번째 겨울을 맞고 있다. 그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17살 때 이주노동자로 왔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김포 대곶에 있는 다이캐스팅 공장에서 3년 동안 노역에 가까운 일을 했다. 공장 담벼락에 붙어있는 컨테이너 쪽방에서 동료 4명과 함께 숙식을 했다. 아침 8시에서 저녁 8시까지 꼬박 쇳가루를 먹으며 자동차부품용 주물을 뽑아냈다. 샤워장도 없는 방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동료들과 새우잠을 자면서 한 달에 수당을 포함해서 60여만 원을 벌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꿈이 있었다. 3년 동안 일을 해 번 돈으로 고향으로 귀환하여 조그만 의류공장을 차리는 게 그의 꿈이었다. 자고 일어나 몇 발자국만 가면 공장의 작업장이었고, 일이 끝나 또 몇 발자국 떼면 방이었지만 그는 꿈이 있어 행복했다. 1주일씩 주야 맞교대로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해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고 작업을 했다. 몸은 쇳가루 때문에 늘 알레르기에 시달렸다. 하루에도 수차례 생산량 독촉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일을 했다. 여기에서 밀리면 갈 곳이 없었다. 어렵게 온 이주노동이기에 뼈가 녹아내리는 한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


그가 처음 한국으로 왔을 때 가장 힘든 것은 음식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공장 식당에서 나오는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가 들어 있었다. 한국인 노동자는 힘을 쓰려면 돼지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먹을 것을 종용했다. 회식문화는 더욱 힘이 들었다. 삼겹살을 유난히 좋아하는 한국인의 음식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때로는 콩비지에 돼지고기가 들어갔는데도 동료들은 양고기라고 속여 먹이곤 했다. 그래서 식사 때가 되면 온통 돼지고기가 들어가 있는 반찬에 신경을 써야했다. 그러다 차츰 공장생활에 익숙하고 안면이 트이자 직접 식당 아주머니에게 돼지고기가 들어갔냐며 물었다. 식당 아주머니도 이슬람을 위해 국을 따로 마련해 주었다. 공장 동료들은 그가 믿고 있는 알라신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 놓았다.


11년이 지난 지금 그는 공장에서 철야만 전문으로 하는 노동자다. PCB를 제작하는 공장에서 저녁 8시에서 아침 8시까지 일을 한다. 그렇게 받는 돈은 140만 원 정도. 그는 80만 원가량을 다카에 있는 가족에게 부치고, 나머지 돈으로 사글세와 식료품을 구입해 생활한다. 그의 방의 가재도구는 간단한 옷장 하나와 텔레비전 그리고 난방을 위한 전기 히터, 방바닥에 깔린 카펫 정도가 전부다. 단출한 생활가구는 그가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천 가좌동 주택가에 있는 그의 쪽방은 언제나 어둡고 침침한 채 냉기를 머금고 있다. 그래도 온기 하나 없는 방에서 10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한 삶이었다. 그가 부양해야 할 가족은 직계가족과 일가친척을 포함해서 스물 세 명이 넘는 대가족이다. 그가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하게 된 것도 가족과 일가친척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방글라데시로 귀환을 하고 싶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대책이 없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젊은 청춘이 이역만리에서 이주노동으로 진이 다 빠져나가는 듯 했다. 최근에는 함께 방을 사용한 동료가 공장에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의 단속에 의해 잡혀갔다. 그나마 온기를 함께 하며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없는 방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이 바닥에서 꽤 소문난 PCB 숙련공이자, 야간근무에 이골이 붙은 경력자다. 사장도 그를 전폭적으로 믿고 야간 근무를 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한다. 10년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공장을 지켜준 것 만해도 사장은 그를 한국사람 못지않게 살갑게 대해 준다. 그가 야근 일만 전문적으로 하게 된 연유는 상대적으로 주간일 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많이 주어졌고, 수당도 15만 원 정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서다. 최근에는 밤낮 없는 미등록자에 대한 저인망식 단속으로 인해 그는 언제나 쫓기는 삶을 살고 있다. 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추방의 공포와 불안 속에 생활해야하는 그는 “한국이 고향인지 방글라데시가 고향인지 이젠 구분이 없다”고 말한다.

 


야만이 양산되는 일상


현재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63만 명을 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양적 증가는 세계 경제체제의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경제체제의 신식민지는 저개발국가로 하여금 값싼 노동력의 이주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저수지 역할을 한다. 대다수 아시아 나라들이 그렇듯이 식민지를 경험한 역사는 파행적인 정치경제체제를 겪고 있다. 전쟁과 빈곤을 체험하고 독재가 하나의 정치체제로 토착화된 아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치욕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내던져진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대를 상실한 삶의 거처는 언제나 동요와 불안정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초국가주의로 발전되고 있는 세계 경제체제하에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서는 이주가 하나의 현상이 되고 있다. 거대 다국적기업의 이윤추구를 위해 가족해체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아시아인의 비극적 삶이 진행되고 있다. ‘아시아체제’라고 불러야 할 이러한 현상은 이제 국경과 국경을 넘어 아시아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주노동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출직 노동자, 가구배달기사, 일용직 건설노동자, 야간 일을 전담하는 노동자로 가는 것이다. 그가 그 나라에서 어떠한 신분이었든지, 어떠한 성장배경을 가지고 어떠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냐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오로지 지시에 따르고 복종하는 건강한 노동력만이 관심일 뿐이다.


김포 장릉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온 자히드(34세)씨는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들의 불평을 대변하다가 관리자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숙사에 샤워시설을 설치해달라는 몇 차례의 요구에 대뜸 집단행동이냐며 알리를 지목하여 폭행을 했다. 알리는 동료들보다 자신이 한국어를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이유로 요구사항을 알렸을 뿐이고, 샤워시설을 설치해달라는 요구는 부당한 요구는 아니잖냐며 관리자의 폭행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회사 측에서 자히드에게 “너희 나라로 가”라고 하면서 일도 시키지 않고 기숙사에 대기시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 폭행을 당한 것도 분한데, 추방까지 시키겠다는 회사 측의 일방적인 계약해지는 알리에게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그날 밤 야반도주를 하여 사업장에서 이탈해야만 했다.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스리랑카에서 온 아산카(29세)씨 역시 사업장 폭행으로 미등록자가 된 경우다. 빨리빨리 하라는 관리자의 작업지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을 계속하자 부아가 치민 관리자가 현장에 있던 작업도구를 들어 아산카를 향해 내던졌다. 그런 사항을 이해할 리 없는 아산카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왜 쳐다보냐”며 이번엔 발과 주먹으로 폭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당장 공장에서 나가라고 소리쳤다. 고용안정센터를 찾아갔지만 외국인 담당자는 다시 돌아가서 일을 하라는 말 뿐이었다. 공장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함께 일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고, 아산카 씨는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먼저 관리자에게 대들어 주먹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아산카는 더 이상 공장에 있을 수 없었다. 사업장 이탈을 해서 미등록자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빨리 하지 않고 쳐다보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폭력이 난무하고, 그것도 모자라 부당해고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되는 상황이 바로 이주노동자의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이제 너무나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인지라 주목할 거리가 못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입은 주장을 하거나 요구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식물인간이 되길 강요하는 것이 바로 이주노동이다. 미등록자에게는 말할 나위가 없다. 의료 보험비, 연금, 각종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모든 혜택에서 제외된다. 그들은 자유롭게 구인을 하기 위해 고용안정센터에 갈 수가 없다. 몸이 아파도 병원은 엄두도 못 낸다. 친구를 만나고 싶어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다. 비싼 택시비를 물고 이동해야 한다. 한국인에게 폭행을 당해도 경찰서에 갈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한권의 모국어된 책도 신문 한 장도 없는 생활이 전부다. 생활하는 방은 단출하다. 언제든지 이동이 가능한 간단한 취사도구와 카펫만이 세간의 전부다. 오로지 번 돈을 고향에 송금을 하기 위한 삶이 유일하다.


그들에게 ‘고용허가제 관련법’, ‘근로기준법’ 등은 무용지물이다. 모든 이주노동자에게 인권을 보장하라는 ‘UN 이주협약’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인간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선거권을 갖는 민주주의체제도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연애도 금지한 채 오로지 ‘돈만 버는 기계’로 산다. 그들은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중심보다 주변부에서, 철저하게 사람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자신을 소외시킨 채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인간


경기도 시흥에 있는 쇼파공장에서 일을 하다 고향인 하노이로 자발적인 귀환을 한 하이(33세)씨는 한국에서의 악몽 같은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10년간 일했다. 지금은 호치민에 진출한 한국 의류회사에서 통역 겸 중간관리자로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악몽처럼 겪은 일은 체불된 임금을 받는 것이었다. 귀환하기 전에 1년간 일을 한 쇼파공장에서 체불된 임금은 700만 원 정도였다. 매달 20~30만 원 정도만 줄 뿐이었다. 이유는 경기가 안 좋아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체불된 임금이 자신을 믿고 함께 일을 한 베트남 동료들까지 포함해서 2,000여만 원. 사장은 “내일, 내일”만 읊조리며 계속 미루기만 했다. 끝내는 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언제까지 주겠다는 합의만을 이끌어냈을 뿐 체불된 임금은 받을 수 없었다. 노동부에서 체불임금확인서를 받고 민사소송을 하기 위해 사장의 재산내역을 조사했지만 사장 명의로 된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결국 사장과의 체불임금을 둘러싼 기나긴 줄다리기에서 남은 것은 허탈감뿐이었다. 그는 자신은 물론 아우들까지 1년간 사장에게 노동력을 빼앗겼다고 했다.



이러한 일례는 비단 하이 씨만 겪는 것이 아니다. 거개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면 한번 이상은 반드시 겪는 한국식 임금 떼이기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고 두어 달은 정상적으로 급여를 계산해서 주고, 나머지 달부터는 고정급이 아닌 그때그때 주머니에 돈이 잡히는 대로 20~30만원씩 시혜적으로 주다가 임금을 달라고 하면 ‘돈 없어’를 입에 달고 사는 것이 한국 사장님들의 한결같은 태도라고 꼬집어 말한다. 그러면 왜 진작 그만 두고 다른 사업장으로 가지 그랬냐고 하면, 체불된 돈을 받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떼이는 돈이 일 년 동안 번 돈과 거의 맞먹는다. 그는 현대판 노예제도가 한국에서 아시아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력을 강탈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행해지고 있다고까지 했다.


파키스탄에서 온 아메드(29세)와 사자드(30세) 역시 1년간 체불된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부에 진정을 냈지만 헛수고였다. 둘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인천 기계공단에서 핸드폰 케이스 사출기에서 한 달 110만원을 받기로 하고 일을 했다. 첫 3개월은 정상적으로 급여가 나왔다. 하지만 그후 10만원에서 15만 원 정도의 급여만 받았다. 그렇게 1년 동안 “내일, 내일”만 믿고 일을 했다. 이직률이 많은 한국인 노동자에 비해 성실하게 일을 한 대가가 고작 체불로 돌아온 것이다. 물론 아메드와 사자드 역시 임금을 떼였다. 공장의 기계는 동생 앞으로 돌려놓았고, 사장 앞으로 된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노동부에 진정을 했지만 주기로 한 날짜는 지나가고 관련 사건은 검찰로 넘어갔지만 사업주는 몇 푼의 벌금만 내면 그만이었다. 임금을 떼어 분통이 터졌지만 어디에다 하소연 할 도리가 없다. 그동안 친구들에게 꾼 돈을 갚으려면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루 빨리 고향으로 귀환을 하고 싶어도 돈이 없다. 빈손으로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호구책을 구하고 있다. 아메드는 자신의 존재가 이처럼 형편없이 대우받는 사실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존재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잊혀지는 것에 대해서 상실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루 빨리 비행기 표 값이라도 벌어 고향에 돌아가 밀농사를 짓고 싶다고 했다.

 


떠도는 육체와 영혼


아메드 씨뿐만 아니라, 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귀환을 꿈꾼다. 그러나 금의환향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코리안 드림은 깨진지 오래다. 요즘처럼 대대적인 단속기간이라도 되면 주변의 동료들이 한 두 명씩 보이지 않는다. 강제출국을 당해 연락조차 두절된 채 사라진다.


오랜 미등록 이주노동으로 이들은 우울증 등 온갖 정신적 피해 뿐 아니라, 각종 산재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질환은 대개 육체노동과정에서 생긴 근골격계가 많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무하메드 알리(33세)씨는 허리를 쓰지 못해서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그는 현재 산재판정을 받아서 요양 중이다. 산재승인을 받기까지 근로복지공단과의 끈질긴 싸움이 있었다.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6개월 동안 일을 한 그는 어느 날 30kg 정도 되는 산업용 모터를 상하차 하는 일을 하다가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잠시 쉬면되겠지 하고 지나쳤는데 며칠 후 다시 동일한 작업을 하다가 그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통증을 다시 느껴야만 했다. 병원에 가서 간단한 통증치료와 함께 물리치료를 받은 것으로 끝났지만 그후로 무거운 것만 들면 허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은 결과 추간판 탈출증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진단서를 가지고 공장에 갔지만 회사 측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물리치료나 몇 번 더 받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허리통증으로 생산성이 떨어지자 회사 측에서는 계약해지를 했다. 알리 씨는 허리가 아프다고 항변을 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지병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졸지에 계약해지에다 미등록자가 된 그는 회사 측을 상대로 산재요청을 했다. 다행히 추간판 탈출증이 일과 인과성이 증명되어 산재처리는 되었지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이미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황폐해졌다. 병든 몸을 받아줄 곳은 없다. 어쩌면 그는 이방인이 되어 떠도는 부초의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인지 알리 씨는 귀환이 두렵다고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호세인(33세)씨는 11년째 귀환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목재공장에서 도장 일을 하다가 얻은 천식으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나마 산재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지만, 의사는 그가 평생 천식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방글라데시에 갈 수 없다. 귀환을 하게 되면 그나마 받고 있는 치료조차 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고국에서는 아내와 딸이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지만 병을 얻은 몸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한탄스럽기만 하다.


귀환하지 못하고 미등록자로 전전하는 것은 스리랑카에서 온 아누라(29세)씨 역시 마찬가지다. 3회의 사업장 변경으로 더 이상 구직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그는 미등록자가 되었다. 그는 고용허가제로 2006년 11월에 들어와 김포에 있는 조그만 도장공장에 취업을 했다. 하지만 도산으로 2개월도 다니지 못하고 직장을 옮겨야 했다. 다시 얻은 직장도 불이 나서 3개월도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세 번째 공장에서는 관리자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불량을 낸다는 이유였다. 그는 불량률에 따른 급여를 공제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일을 했지만 빨리 빨리를 재촉하는 작업장의 분위기를 쫓아갈 수 없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관리자가 폭행을 했다. 물론 회사 측에서는 고용안정센터에 근무태만과 불성실로 신고를 했고, 그는 3회의 구직변경으로 인해 불법체류자로 전락했다. 한국으로 들어온 지 이제 막 1년 2개월을 넘고 있었다. 그는 매번 회사를 옮기는 바람에 모아놓은 돈을 커녕 빚만 눈덩이처럼 쌓였다고 했다. 송출비용을 갚아야 귀환할 수 있는 처지가 된 그는 지방의 친구들을 수소문하면서 취직자리를 부탁해보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구인란이 겹쳐 현재 3개월 째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불온한 인간의 탄생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의 주장과 발언은 금기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외치는 자는 곧 추방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발언은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주장하는 영혼은 불온한 것이다.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와서 부당한 회사의 요구에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미등록자가 된 파키스탄에서 온 아슬람(32세)씨는 “임금을 달라는 요구를 외면하고 우리를 해고하고 불법취업자로 만들었다. 강제출국조치를 내렸다. 우리는 이 땅에 노예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를 가지고 장사하지 마라. 우리는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정당한 요구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의 배경에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불온한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다. 단속의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이주노동자의 집단적 요구와 정치적 발언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합을 만들고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해 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한 이주노동자들의 정치활동에 대해서 공안정치를 방불케하는 대대적인 단속을 진행하고 있다. 경제적 요구에서 정치적 요구로 발전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이주노동운동을 사전에 봉쇄를 하자는 의도겠지만 이주노동자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 없이는 그 실질적인 실효는 의문이 간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는 이주노동자를 잠재적인 범죄군으로 몰아가는 한국사회의 천박한 인권의식이 있다. 외국인 범죄율의 증가와 국민일자리 잠식, 저소득층의 증가, 거주지역의 슬럼화 등 사회적 갈등을 초래할 불온한 세력으로 이들을 지목하고 있다. 사회적 위기의 희생양으로 이주노동자를 지목하는 것이다.


김포에서 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하킴(30세)씨는 “이주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한국정부는 모든 노동력에 대해서 범죄낙인을 찍는 것과 같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는 또한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화 조치와 자유로운 노동권의 보장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그처럼 떠들어 대는 다문화 사회에 부합하는 조치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정부주도하의 다문화 정책은 그야말로 모든 이주민과 이주노동자를 들러리로 내세우는 ‘인종 페스티발’이라고 몰아 부친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에요.” 1995년 1월, 13명의 네팔 산업연수생들은 온 몸을 쇠사슬로 묶고 명동성당에 모여 여권압류, 감금노동, 폭행·폭언, 장시간 저임금 노동 등에 항의하며 폭로한 인권유린 사실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벼랑에 몰려있다. 날로 증가되고 있는 표적 단속과 추방, 매년 증가하고 있는 사업장내 폭행과 임금체불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국제결혼의 급증과 외국인의 정주화가 진행되는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3D업종을 떠맡고 있는 주체로 이주노동자를 수용하는 것에 대해 한국 사회는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와 부정적 편견은 인종차별을 낳을 가능성을 늘 내포하고 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일을 하고 있는 파키스탄에서 온 샬림(29세)씨는 “우리의 노동력은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많은 사장들은 우리의 노동력을 최저임금 수준에도 못 미치는 대우를 한다. 그것마저 부족해 식비와 기숙사비를 제외하고, 일이 없을 때 무노동·무임금을 적용하면 실제로 남는 것은 착취 받는 몸 밖에 없다는 분노가 인다”고 말했다.


미국, 프랑스 등 1세계 출신 미등록자들에게는 출국고지만이 전달되지만, 아시아·아프리카 출신자들에게는 인간사냥을 방불케 하는 폭력적인 단속과 구금, 그리고 강제 퇴거가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다. 또한 방글라데시, 네팔, 파키스탄 등 일부 국가 출신의 귀화한 시민권자에게 가족초청은 여전히 허용되고 있지 않다. 이주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표적단속과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무시한 강제 퇴거의 집행은 한국 정부가 얼마나 배타적인 인종차별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잣대다. 하루빨리 ‘UN 이주노동자 권리협약’을 비준해야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와 경기 침체로 극심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요즘, 이주노동자는 다중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주노동자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또 어디로 가야할지, 자명한 것은 자의든 타의든 ‘불온한 너무나 불온한 인간’으로 재탄생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글쓴이 이세기 halmibburi@hanmail.net
* 이글은 계간 <작가들>겨울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이주 꿈을 만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 곳 없는 이주청소년  (0) 2009.03.25
두 이주민의 세상살이  (0) 2009.01.21
낯 뜨거운 이주노동 경제학  (0) 2008.11.23
귀환 이주노동자 리아 이야기  (0) 2008.10.07
애리카의 꿈  (0) 2008.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