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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두 이주민의 세상살이

싸왓디카, 티마폰 씨의 노래


고향에는 부모님이 계신다

사람들이 친절하다
물소가 생각난다
여러 가지 야채가 많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티마폰(26세)씨가 ‘이주민과 함께하는 아시아 문학 낭송제’에서 낭송한 「고향」이라는 자작시다. 고향의 향수가 행간에 짙게 묻어 있다. 한줄 한줄 정성껏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언뜻 그녀가 살던 태국의 동북부 농카이가 떠올랐다.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논에 물소 떼가 어슬렁거리고 여유롭고 순박한 삶이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지듯 떠오른다. 낭송을 마치자 그녀는 한국어를 공부하며 난생 처음 시를
썼다며 수줍어한다.



“제 고향 농카이는 라오스와 국경 지대에 있어요.”


그녀는 농카이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타버라는 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 회사생활을 했다. 때마침 한류바람을 타고 한국 드라마가 유행했다. ‘대장금’을 비롯하여 한국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고향에 살았던 이모의 딸도 대구로 결혼 이주를 했다. 가끔씩 들려오는 한국 생활이 마냥 궁금하고 새로웠다. 그녀 역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사촌 언니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해서 2007년 5월 한국으로 왔다.


그녀에게 고향 얘기를 묻자 눈동자가 빛난다. 예전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물소가 많았단다. 하지만 요즘은 땅이 오염되고, 풀도 많이 없어져 물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태국의 야채를 알려달라고 하자 그녀는 밝게 미소를 짓는다.


“태국은 야채가 많아요. 카나, 박티, 박붕, 바까, 박뱜릉…….”


그녀가 줄줄이 대는 태국 야채 이름에서 고향의 풀내음이 흠씬 묻어 나온다. 우리네 봄나물을 연상케 한다.


“겨울이 추워요.”


그녀는 한국의 겨울이 혹독하리만큼 춥다고 한다. 하긴 그녀가 태어나 자란 동북부 롱카이는 우기와 건기가 전부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푹푹 찌는 더위가 찜통을 방불케 한다. 물론 태국에도 겨울은 있다. 하지만 북부지역인 치앙마이를 제외하곤 겨울다운 겨울이 없다. 한국에 와서 난생 처음 흰 눈을 보고 너무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국의 겨울 날씨는 춥지만 흰 눈이 있어 좋다고 한다.


“지금은 한국어와 한국 음식 공부를 많이 하고 있어요.”


한국어가 어렵지만 공부하는 것이 마냥 즐겁다는 그녀는 함께 결혼 이주로 온 친구들과 모여 한국 음식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한다. 친구들과 만나 태국 음식을 함께 해 먹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은 한국 생활과 음식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그녀는 된장찌개, 잡채, 꽃게탕, 동태찌개 정도는 직접 끓일 수 있다. 어떻게 배웠냐고 하자,


“인터넷에서 배웠어요.”라고 한다.


“아직 모든 것이 부족해요, 한국 예절도 배우고 싶고, 한국어도 좀 더 많이 배우고 싶어요.”


그런 바람에서 이주민으로서의 삶이 배어 나왔다. 새로운 문화를 접한다는 것은 낯선 일이지만 삶이 곧 일상이 아니겠냐고 그녀는 말한다.


“모든 게 떨리는 처음이에요.”


그러면서 그녀는 이주민을 위한 공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금 다니고 있는 여성복지관 내 한국어교실은 한국어를 공부하고 모처럼 친구들과 음식을 나눠 먹고 싶어도 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다고 한다.


“막상 이주민이 모일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요.”


사랑방처럼 이주민이 모일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녀의 바람이다. 그녀는 또한 한국어를 공부하는 강의실에 많은 이주민이 공부를 하다 보니, 배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상황은 다른 결혼 이주민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주민은 어렵다는 말을 먼저 못해요.”


한국인에 비해 아무래도 자신들은 이방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여건이 되면 맞벌이도 하고 싶어요.”


남편은 맞벌이를 원하지 않지만 그녀는 일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한국에서 생활하려면 남편 혼자 일해서는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회사 일도 하고 싶고, 한국어를 더 배워 통역도 하고 싶다는 그녀는 여느 결혼 이주민처럼 진취적이다.


21세기의 노마드라고 일컬어야할 이주민은 정주민과 다르다. 정주민이 한 군데 정착을 하여 문화의 꽃을 피운다면 이주민은 이동을 통해 새로운 문화의 전파자이자 향유자로서 꽃을 피운다. 때문에 이주민은 누구보다도 도전적이며 모험적이다. 티마폰 씨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자. 그녀가 수줍듯 당차게 말한다.


“태국을 알리는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귀화자에게 희망이 있는 사회


티마폰 씨의 경우처럼 한국 생활에 적응하며 나름대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찾아가는 이주민이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이주민의 적극적인 진취성에 비해 이를 받아줄 여건은 밝은 편이 아니다.





파키스탄 카라친에서 이주노동자로 와서 한국 여성과 결혼한 후 귀화한 자히드 씨(37세)는 한국 사회에서 직업을 구하는 것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 한다.


그는 매번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썼지만, 아시아계 이주민을 받아주는 직장은 거의 없다.


“이주민을 위한 직업양성소와 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히드 씨와 같이 사회적 약자인 이주민을 위해 기업에서 채용의무기준을 적용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친다. 가장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직장이 필요한 데 자신과 같이 사무직을 원하는 사람은 들어갈 직장이 없다. 설령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차별적 시선’을 견디기 어렵다. 자신을 쳐다보는 ‘불편한 시선’이 있는 한 마음 놓고 일할 수 없다.


“머릿속이 온통 직장과 아이 교육문제로 가득 차 있어요.”


그는 한국은 학교 공부 외에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며 긴 한숨을 쉰다. 학교 공부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인지, 학원에 가는 아이를 볼 때마다 자신도 어느덧 한국의 아버지가 되어 경쟁에 끼어든 기분이란다.


국제 결혼한 이주민의 경우 처음엔 서로 잘 보이려 하기 때문에 문화차이를 못 느낀다고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화적 차이로 인한 벽을 느낀다.


“이슬람의 기준으로 보면 여성이 밖에서 일을 하고 회식을 하고 술을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로 아내가 직장을 다니는 것을 자신도 극렬 반대했다. 아내의 늦은 귀가는 부부 싸움의 원인이 됐다. 자신은 아침에 홍차와 빵을 먹고 싶지만, 아내는 된장국에 김치를 선호했다. 아내가 친정식구를 챙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의 교육문제, 음식, 직장 등 시간이 갈수록 문화의 차이가 점점 확인되고 벌어졌다. 이러한 가정 내 갈등의 원인에는 문화적 차이도 있지만 경제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직장을 구하고 싶어도 마땅한 기술이 없는 그는 벌써 6개월째 실업자로 지내고 있다. 귀화한 같은 파키스탄 친구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문적인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 같은 곳에서 기술을 배워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싶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자신과 같은 귀화자의 직업재활을 위해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한국인 강사의 말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 쓰기가 안되기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기 위해서라도 귀화자를 위한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렵게 한국 국적을 땄지만 정작 한국 사회는 귀화자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 역시 세금 내는 한국 시민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내버려졌다는 상실감이 큽니다.”


그로 인하여 부부간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했다. 아이의 교육문제도 문제지만, 가장으로서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다.


“벌써 몇 개월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내고 있지만 다 허사였습니다.”


아내는 공장이라도 구해서 일을 하라고 하지만 이젠 포기했다고 한다. 자히드 씨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싶지만 차별적 시선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어 이제는 자신이 없다.


“애증이라고 하나요? 이젠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입니다.”


귀화 이주민으로 12년을 보낸 지금 남은 것은 차별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사회부적응자로 전락하는 자신의 모습뿐이다. 결혼한 지 10년 이상된 결혼이주민 가정의 이혼율이 높아지는 것이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편견과 싸워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문화적 차이와 경제적 이유로 이혼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서 하나, 둘 생길 때 마다 두렵다고 한다.


“이주민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이주민에 대한 고용기회를 확대하고 창업지원금 같은 제도도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그동안 수없이 이혼을 결심하기도 하고 한국 사회에 대해 원망도 했다. 삶이 밑동까지 도려내듯 발가벗긴 기분으로 살지만 그래도 가장으로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치욕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면접 볼 때마다 우리나라 젊은이도 일자리가 없는데 하물며 외국인을 채용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들을 때는 며칠 동안 잠이 오지 않는다.


“낙오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는 한국 사회를 떠나서 다시 유랑하는 이주의 삶을 사는 것이 이젠 어렵다고 했다. 자라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정착을 하고 싶다. 몇 번이고 이민을 갈까 망설였지만 빈손이 가야할 곳은 이 세상 어느 곳도 없다. 차별도 차별이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이주민의 삶은 막장 삶과 다를 바 없다. 왜 자신만 참아야 하는가라는 자궤감도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다 보니 피해의식도 많다고 한다.
 

“원망이 점점 내 안에서 커지는 것이 두려워요.”


아내는 힘들어도 참으라고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귀화 이민자를 만나면 온통 직장 구하기 힘들다는 말뿐입니다.”


요즘처럼 세계 금융경제 위기로 한층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마당에 이주민이나 귀화자들이 희생양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는, 어렵게 꿈을 찾아, 새로운 삶을 위해 찾아온 이주민에게 우리 사회가 좀 더 열린 기회를 열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췄다.
 

* 글쓴이 이세기 halmibburi@hanmail.net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6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