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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오늘'

빈 껍데기뿐인 다문화정책

빈 껍데기뿐인 다문화정책


한국에 온 지 8일 만에 남편의 폭력으로 사망한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20세)씨 사건은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까지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결혼중개업체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이주여성 상품화와 배우자에 대한 거짓된 정보에 의한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국제결혼의 멍에는 이주여성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2007년 남편에게 맞아 살해되어 일주일이나 시신이 유기되었다가 발견된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19세)씨, 2009년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뱃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캄보디아 여성 초은(18세)씨 사건은 국제결혼의 폐해가 위험 수위를 넘어 다수의 이주여성들이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있음을 보여준다.


산산이 부서진 결혼이주의 꿈

결혼이민자들에게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농촌에서는 무턱대고 돈만 지원하는 ‘농어민 국제결혼비용 지원사업’이 진행 중이며,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결혼 자금까지 보조해주는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불법 국제결혼중개업체들이 활개를 치고 있어, 탓티황옥의 비극이 재현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이처럼 비정상적인 국제결혼은 이주여성에 대한 차별과 학대로 이어져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주여성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사도우미, 치매에 걸린 노부모의 간병인, 장애인의 활동보조원, 섹스 파트너, 아이를 돌봐줄 보모가 되기 위해 결혼이주를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베트남 이주여성 탓티황옥 씨도 이와 다르지 않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한국에 왔지만, 그의 꿈은 정신질환을 앓던 남편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표면적으로는 불법 국제결혼 중개업체의 잘못된 형태가 원인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시아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천시, 그리고 여성의 성상품화가 숨어 있다. 이것이 다문화사회로의 본격적인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한국사회의 ‘못난 자화상’이다.


이주여성의 상품화, 한국식 다문화주의

현재 한국에 체류 중인 이주민 수는 120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한 해에만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이 2만 5000여 명에 이른다. 전체 결혼의 13%를 차지할 만큼 국제결혼은 한국사회의 또 하나의 결혼풍속도로 빠르게 정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대변이라도 하듯, 2000년 이후 결혼이주민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2007년에는 동남아시아 이주여성을 성상품화한 국제결혼 광고가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잠시 주춤하였다가, 2009년부터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이주와 결혼이주에 의한 다문화가정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다문화관련 정책과 제도, 그에 따른 지원대책 마련이 시급한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회통합 이수제’를 비롯하여 ‘다문화가정지원법’ 등이 시행되면서 다문화가정의 조기정착 및 안정적 사회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사회통합프로그램이 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일방적인 동화정책에 기반을 둔 다문화이해교육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정폭력 등 피해를 호소하는 결혼이주여성을 상담하다 보면 의외로 많은 한국인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여성들을 사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싸울 때마다 “내가 너를 얼마를 주고 사왔는데, 내 말을 듣지 않느냐?”, “비싼 년”이라는 언어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으면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이주여성들은 토로하고 있다.


결혼이주여성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을 주는 것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결혼중개업체는 ‘돈을 주고 사온 여성’이 도망가면 책임진다는 광고를 내기도 하고, “도망가면 책임지고 재알선”, “전액후불제”라는 문구를 공공연하게 게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들의 신분증(여권, 외국인등록증)을 압류하거나 자국 출신 이주민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외출을 제한하기도 한다. 심지어 따로 밥을 먹으라며 노예와 같은 대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결혼이주여성이 처한 이러한 현실은 그대로 한국사회의 다문화 수준을 말해준다. 양성평등을 전제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아시아 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이 국민정서로 자리 잡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단일민족 신화와 순수혈통주의가 낳은 한국식 다문화주의가 팽배해 있는 것이다. 이는 국경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주·이동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탈민족·탈국가의 세계화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다.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 ― 다문화정책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50년에 결혼이민자와 그 자녀가 216만 명을 넘어서고 총인구 대비 비율이 5.11%을 넘어서 본격적인 다문화사회로 이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미 우리 사회는 저출산과 노령화로 인한 노동인구의 감소,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의 증가가 가장 큰 사회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그 대안으로 적극적 이주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거의 모든 정부부처를 비롯, 지방자치단체별로 다양한 ‘다문화’ 관련 정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소리만 요란한 ‘빈 수레’라는 지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한 각 지역별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설립되어 있지만 형식적인 요건만 갖추었을 뿐, 수요자 중심의 실질적인 지원은 미비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결혼 이민자들이 필요로 하는 지속적인 한국어 학습과 직업교육 등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결혼이주여성의 경우 적극적으로 직업재활을 통한 경제적 분담을 원하고 있으나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방안은 마련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대다수 이주여성들은 경제권을 갖지 못한 채 가사노동에 전념하거나 배우자의 일방적인 요구에 ‘가사 도우미’로 전락하고 있다. 여기에 남편과 시부모와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 등이 상존하고 있어, 가족해체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다. 개개인의 인권은 사라지고 남편에게 종속된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의문이다. 순혈주의에 의한 한국식 다문화주의의 희생양으로 영혼 없는 이주민을 탄생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주인권단체 NGO활동가들은 “양적으로만 쏟아지는 ‘다문화정책’이라는 허울 속엔 일방적인 동화의 강요만 있을 뿐, 상호 존중과 소통을 통해 질적으로 나아지는 열린사회로서의 ‘다문화사회’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문화를 해소해야

결혼이주여성을 동화정책의 대상으로 보고 실적에만 집착하는 ‘전시 다문화’가 횡행하고 있는 이상 한국사회에서 이주여성의 지위는 현재 수준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더욱이 아시아 이주민에 대한 구별짓기와 순혈주의에 의한 일방적인 동화정책의 변화가 있지 않고서 한국의 다문화정책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유입되는 초기과정에서부터 이주민들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안정적인 체류를 통한 인권보호와 폭력예방, 폭력 피해자 보호지원 강화는 물론, 미등록 신분으로 전락한 여성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통해서 이주여성에 대한 인권침해실태를 파악하는 일이 시급하다. 무엇보다도 한국 정부가 ‘모든 이주민이 인간으로서 누리는 모든 권리와 자유는 인종, 국적 등의 차별 없이 행사돼야 한다’는 국제수준에 걸맞게 각종 ‘협약’을 채택하고 승인해야 한다. 또한 이주민에게 가해지고 있는 시민권적 권리의 제한을 철폐해야 하며 내국인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주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결국 한국사회의 다양하고 뿌리 깊은 차별과 연계되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세기  | 시인·인권운동가.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먹염바다>가 있음.

출처: 이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