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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쉼터로 쫓겨 온 여성들

쉼터로 쫓겨 온 여성들


이세기



한밤중의 탈출
어디선가 박하(薄荷)향이 난다. 후에(베트남, 23세)가 퇴근길에 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손에 든 게 뭐냐고 물으니, 박하란다. 무엇에 쓰려고 구했냐고 하니, 약으로 쓰려고 한단다. 누가 아프냐고 했더니, 후에는 머리를 가리키며 함께 방을 쓰는 친구가 “생각이 많아서 아프다”고 했다. 박하로 즙을 만들어 먹으면 괜찮단다. 우울증 치료에 약효가 있는, 고향에서 해온 일종의 민간요법이란다. 병원에 가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박하즙을 먹으면 괜찮다고 한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 구했냐고 물으니, 화원에서 구했단다.

후에는 결혼이주여성이다. 한국 이름은 후에의 한자식 표기인 꽃 화(花) 자를 써서 이화(李花). 하노이 인근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 나이 스물한 살. 결혼중개업체를 통해 하노이로 온 남편과 맞대면을 하고 하루 만에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결혼했다. 그리고 비자가 나오자 곧바로 한국으로 와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강원도 양양. 온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주변에 아는 베트남 사람 하나 없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촌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적막했다. 열네 살 터울의 남편과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1개월째. 남편은 왠지 모르게 말수가 없고 부부생활조차 꺼렸다. 후에는 남편이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같아 노심초사한 날을 보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과 대화가 없자, 잘못된 결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겪다 보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헤어지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남편 집안 쪽에서 결혼 비용으로 들어간 돈을 돌려달라고 했다. 심지어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에게까지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후에를 보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혼 비용으로 든 500만 원을 달라니! 덜컥 겁이 났다. 속도 상했다.

고향의 부모가 떠올랐다. 농사를 지으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부모의 땡볕에 그을린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으로 시집온 자신의 선택에는 큰딸로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잘못된 결혼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베트남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지만 허사였다. 먼저 결혼중개업체에 들어간 돈을 갚으라고 했다. 각서도 썼다. 그리고는 다락방에 가두었다.

자신이 감금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선택해서 온 한국에서 실패한 삶을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삶이 두려웠다. 그녀는 3일째 되는 날 저녁, 사방이 어둠에 쌓인 캄캄한 산골의 겨울밤에 다락방 쪽문을 통해 빠져나와 산길을 뛰어 내려오면서 무작정 달렸다. 가끔씩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달렸다. 손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손 그대로였다. 여권은 빼앗긴 상태였고, 가방 하나 없는 야반도주였다. 그리고는 큰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았다.

“무작정 택시를 타고, 친구가 일하고 있는 인천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그날따라 친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해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운전을 한 택시 운전사도 난감했다. 결국 그녀를 경찰지구대에 내려놓고 떠났다.

“경찰 중에 한 분이 아내도 중국 사람이라면서 친절하게 쉼터를 알려줬어요.”

다행히 쉼터를 제공받은 후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잡혀서 남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에는 강제 출국이 될 운명이라고 직감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와 동생이 떠올랐다. 고향에 가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후에는 미등록자의 삶을 선택하기로 했다.

후에가 집을 나오자, 남편 쪽은 경찰에 가출 신고를 했다. 그리고는 이혼 청구를 했고, 결혼중개업체에 다른 여자를 소개해달라고 요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자가 도망가고, 결혼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몇 번이고 친구를 통해 후에를 수소문했다. 잡으면 출국시키겠다는 협박도 빼놓지 않았다. 친구 역시 참다못해 핸드폰을 교체했다. 남편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결혼 2개월 만의 일이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맞은 혹독한 겨울을 그렇게 두 해를 보냈다. 그리고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그녀는 첫 월급을 타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고향에 있는 부모에게 속옷을 선물했다. 일종의 내복인 셈이다.

“고향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점심을 먹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빙그레 웃는다.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다. 왜 없겠는가. 물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물었지만 역시 웃음뿐이다. 아마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쉼터에서도 악착같은 것으로 정평이 났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후에의 손이 빠르고, 야무지다고 했다.

스물세 살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의 나이 스물셋, 세상을 일찍 알아서인지 그녀는 조숙하고 말이 없다. 아시아의 여성은 일찍 세상을 알고, 쉽게 늙고, 일찍 어머니가 되어간다. 후에도 마찬가지다. 산전수전을 겪은 마음에는 상처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잊지 못할 상처는 가끔씩 혼자 있는 시간에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생활은 모든 것을 잊게 할 것이다.

마지막 부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달리(우즈베키스탄, 38세) 씨도 마찬가지다. 이국에서 떠도는 몸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안성 시내에 있는 숯불갈비 집에서 일했다. 일이 고되고 쉬는 날이 없었다. 서빙에다 주방 설거지는 물론이고 내실 청소까지 도맡아 했다. 주말에도 쉬는 날이 없어 몸이 쉽게 축이 났다. 덕분에 감기와 몸살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괴로운 것이 있었다.

“사장은 한가한 시간에 틈만 나면 손을 쓰다듬거나 뒤에서 껴안는 거예요. 심지어는 모텔에서 잠잘 것을 요구하기도 했어요.”

결국에는 6개월 만에 야밤에 옷도 챙기지 못하고 쫓기듯 쉼터로 피신을 왔다. 고향에 어린 딸을 두고 온 그녀는 참지 못하는 것은 외로움도 아니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란다. 일터에서 벌어지는 성추행이라고 했다. 그녀가 숯불갈비 집을 나온 것도 성추행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왔을 때였어요. 사장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예요. 한 손에는 맥주 등을 사 와 함께 얘기 좀 하자는 거예요. 직감적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불법체류자라서 걱정도 됐어요. 사장은 걸핏하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넘기겠다고 했거든요.”

결국 그녀는 참다못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선 그 길로 숯불갈비 집을 나왔다.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수시로 겪는 일이었다고 했다. 이런 일도 이골이 날 만큼 났다. 그녀는 안성, 천안, 일산 등지에 있는 식당에서 주로 설거지와 음식 나르는 일을 도맡아 했다. 주말에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할 때도 많았다.

“숙식을 제공받고, 한 달에 100만 원 내외예요. 음식을 나르다 보면 쳐다보는 시선이 짓궂어요. 어떨 때는 젖가슴이 크다, 엉덩이가 크다는 말이 들려오곤 해요.”

그녀의 입에서 늘어놓는 한국인이 쏟아낸 음담패설이 정도를 넘는다.

“한국 남자들은 술 몇 잔만 입에 들어가면 함께 동석을 요구하고 무작정 술을 따라줘요. 먹고 싶지 않은데도 먹으래요. 성적인 농담이 많아요. 어떨 때는 나이 든 아저씨들이 오빠라고 부르라고 강요까지 해요. 심지어는 2차를 가자고 하는 손님도 있고, 몸에 손을 대는 사람도 있어요. 항의를 하면 그저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해요. 그럴 때마다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하나 묻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 왜 그런데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농담에 굶주리고, 성에 굶주리고,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비굴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는 듯했다. 우리 모두가 가면을 쓰고 세상이라는 무대에 나온 배우가 아닐까, 생각이 잠시 스쳤다. 아마도 제목을 붙인다면 ‘인격모독’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생계만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 선뜻 동의했다.

“나도 수치심 있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방으로 들어오면 발바닥을 주물러요. 그럴 때마다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하고 스스로 묻고는 해요.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숨죽여 사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밉던지 잠시 침묵이다. 눈빛에 먹물 같은 짙은 슬픔이 감춰져 있다.

“가끔씩 여기가 어디인가 생각해 봤어요. 내 고향은 아니죠. 기후도, 냄새도, 무엇보다도 말이 달라요.”

그녀는 매번 고향을 생각했다.

“입맛이 없을 때 고향 생각이 간절해요. 어머니가 해준 양요리가 먹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녀는 음식 얘기를 꺼냈다. 남는 것은 미각뿐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국의 경주 같다는 타쉬켄트의 푸른 하늘을 떠올렸다.  

“2년만 더 일하고 갈 거예요.”

한국에서 5년째.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때쯤이면 꿈이 이뤄질까? 아마도 그녀도 혼자 있는 밤에는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지. 가족? 자기 자신? 미래?

“가족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도 가족이다. 아시아인은 그래서 슬프다. 그녀 역시 가족을 대표해서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왔다. 그곳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0년 이상 일했던 유치원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처음 한국에 와서 의정부 쪽에서 봉제 일을 했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식당 쪽으로 일자리를 바꿨다. 무엇보다도 숙식이 해결되는 것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껏 성적 농담이나 당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미등록자로 존재감이 없이 유령처럼 떠도는 자신의 처지를 그녀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때마침 전화가 온다. 면접을 보았던 식당이란다. 잠시 통화를 하고 난 후, 일자리를 구했다며 서둘러 나간다. 기다렸던 일자리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지막 부탁이라며 한마디를 던지고 나갔다.

“나도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처럼 똑같아요.”  

그 말은 인격적으로 대우해달라는 부탁일 것이다. 인격에도 무게가 있을까? 아마도 모든 사람의 인격은 같은 무게가 아닐 것이다. 그게 세상의 이치고 법칙이다. 아시아에서 인격은 값싼 노동력으로 등치된다. 값싼 노동력은 값싼 인격으로 전락된다. 그게 이주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못난 자화상이 아닐까?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변하지 않는 것이 생활이다. 불안을 껴안고 살아야할 운명적인 삶이다.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의 통계에 의하면 결혼이주여성과 여성이주노동자들이 성폭행 등으로 쉼터에 머물기를 요청하는 건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 2008년 811건, 2009년 1181건…. 언제까지, 얼마까지 증가할지 아무도 모른다.

사랑? 행복? 새로운 삶? 어쩌면 모든 것이 다 허상일지 모르겠다. 누군가 말했다. 결국 돈이다. 돈으로 결혼도 사고, 돈으로 성도 소유한다. 활개 치는 세계화는 오지까지 미치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 사람들은 슬프다. 아시아가 존재하는 이상, 슬픔도 증가할 것이라고. 이 길이 끝이 보이지 않는 연유는 무슨 까닭일까.

귀뚜라미가 운다. 지금쯤 동남아시아의 어느 집 마당 구석, 중앙아시아의 풀숲에도 귀뚜라미가 울 것이다.  



글쓴이 시인이며 인권운동가로서 현재 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에서 일하고 있다.
* 이글은 <삶이보이는창>76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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