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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꿈을 만나다

다알리아와 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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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알리아와 칸나

이 세 기




다알리아는 말없이
말없이 피고

그 옆 칸나도
피어 붉듯 피어

말없이 타고

다알리아와 칸나를
오가는
오가는

잠자리만
몸이 뜨거워 뜨거워

앉았다
날았다

베트남 오누이
소리 없이 떠나간

수세미꽃 피는
빈집 빈 마당에

다알리아와 칸나는
피고
말이 없이 피고



내가 일하는 <이주민센터>에는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의 애끓는 도움의 요청이 많다. 여름이 타들어가는 어느 날 아침, 베트남 여성에게 절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내용인즉, 산달이 3주 정도 남았는데, 남편이 출입국관리소에 잡혔다는 것이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좌불안석인지 막막한 떨림이 전해졌다. 이국에서 산통과 산후 몸조리까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산모의 정신적 안정이 우선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출입국관리소에 일시보호해제를 요청하고 나서 출산예정일에 대한 의사의 소견서와 보증금 300만 원을 들고 공항 출입국관리소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기엔(29세)은 한국말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그의 낙천적인 성격은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특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와 함께 노을이 지는 영종도를 빠져나오면서 그가 살고 있는 인천 검단에 있는 당하동으로 향했다. 부인인 후엔(23세)은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온 후엔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기엔을 만나 결혼했다. 그녀는 출산을 앞둔 상황에서 이렇게 남편과 재회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다.


그의 집에는 노란 수세미꽃이 피어 있고, 전깃줄을 타고 수세미가 열려 있었다. 뜰에는 조그만 채마밭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종 허브 종류의 야채가 자랐다. 기엔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 역시 이주노동자로 인근의 공장에서 사출직종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인근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그녀와 함께 연애라도 할 심사로 기엔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노이에서 온 아리따운 스물한 살 처녀인 후에는 수세미꽃처럼 예뻤다. 저녁이면 인근의 공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기엔의 집에 와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며 저녁 한때를 보내곤 했다.


점점 산달이 차 후엔은 예쁜 딸아이를 낳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태어난 아이에게 꽃 이름을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데, 기엔도 딸의 이름을 연꽃이라는 뜻의 ‘리엔(Lien)’이라고 짓고 한국명으로는 ‘연이’라고 하였다. 3개월간의 일시보호해제 기간이 다가오자 기엔은 그동안 받지 못한 퇴직금을 받았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생계를 위해 취직자리를 구할 요량으로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며 보낸 모양이다. 나 역시 밀려오는 상담 처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엔의 일시보호해제를 위해 보증을 해 준 터라 출입국관리소에서 보호관찰이라는 명목으로 이런 저런 괴롭힘에 시달렸다. 담당 조사관은 소재확인을 위해 나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 전화를 하곤 했다. 하지만 굳이 그 일 때문만이 아니라 가끔씩 그곳 인근 공장에 현장방문을 할 기회가 많아 겸사해서 기엔의 집에 가서 냉수도 얻어먹고, 마당 한가운데 넝쿨로 올라가는 수세미꽃 보기를 좋아해 들르곤 했다. 그때마다 기엔의 집에는 일을 끝내고 후에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젊은 이주노동자들이 어김없이 기웃거렸다. 뭇 베트남 총각들이 여름날보다도 뜨거운 연정을 품고 있었다.


수세미가 튼실하게 익어갈 무렵, 기어이 기엔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출입국관리소에서 기엔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란다. 나는 그가 떠날 것이라고 이미 짐작했다. 험난한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온 그에게 베트남에 있는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것과 함께 이제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까지 겹겹의 가난한 삶이 오롯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보증금 300만 원이 문제가 아니라, 앞날에 대한 무거운 짐이 그를 한없이 짓눌렀을 것이다. 거개는 일시보호해제 기간이 끝나면 출국하는 경우가 많지만, 기간이 끝나면 잠적하는 경우도 많다. 기엔은 다시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을 택하고 그의 가족을 데리고 그야말로 야반도주를 했다. 생존을 위해, 이제 막 태어난 어린 딸을 안고 거처를 옮긴 것이다.


다시 찾아간 기엔의 집은 텅 비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집 주인은 밤이면 밤마다 찾아오는 베트남 젊은이들 때문에 시끄러웠다고 하면서, 간밤에 소리 소문 없이 이사를 했단다. 그러면서 먹지도 못할 수세미는 왜 저리 달렸는가, 하면서 사라졌다. 텅 빈 방 안을 보면서 기엔의 간소한 살림살이가 떠올랐다. 간이 옷장과 거울 하나, 텔레비전과 소형냉장고, 그리고 밥상이 전부인 가세를 짊어지고 그는 어둠 속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가 떠난 텅 빈 집 마당에는 수세미가 파란 하늘 아래 열렸다. 그가 언젠가 찾아오면 수세미 쌀국수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뒤로 하고, 그가 떠난 자리, 마당 한편에는 후엔과 후에를 닮은 다알리아와 칸나가 붉게 여름 한낮을 서 있었다.


글쓴이 시인이자 인권운동가이며, 시집으로 『먹염바다』가 있다.
* 이 글은 <삶창>5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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